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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Jun 05. 2023

빗방울이 되어 울었나요. _ 딸기잼과 비빔국수.


 이곳은 빗방울이 억수처럼 쏟아집니다. 침묵을 지키던 검은 하늘은 한방울, 또 한방울 빗방울을 토해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땅 위로 눈물 길을 만들어버리고 있어요. 청개구리들의 노랫소리가 이지 않던 호수에는 빗방울들이 내리눌러 모든 환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거센 빗방울에 꽃들은 쓰러지고, 나무들은 기울어 가는군요. 몸서리 치도록 처절한 슬픔은 표현할 길이 없는 침묵이 되어 봇물처럼 터져버린 눈물이 되어가나 봅니다. 격렬슬픔이 소실점이 되어 빗방울에 쓸려 내려갈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저를 밀어넣습니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다우니까요.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조금 나아질까요. 슬픔이 빗방울이 되어 바닥에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습니다. 통점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더듬거렸는, 이젠 괜찮을 수 있을거라 믿어왔는데, 얼마 전 그 지점을 화살이 과녁을 뚫어버리듯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애틋함과 무력함이 운명을 향한 분노로 변신하는 순간이었지요. 빗방울은 언제쯤 고요한 진공 상태로 사라질까요.

아니, 사라지기나 할까요.


'흥분 상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면,

 그 때 가장 깊은 비애 속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

 내면 안에 머물기, 조용히 있기, 혼자 있기,

 오히려 그때 슬픔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 -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소란스러운 군중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고독과 고뇌가 자리한 고요한 심연이 보송한 이불처럼 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누구도 관심없을 격정의 페르소나를 따라 빗방울이 산 허리를 집어삼키며 흘러내립니다. 심장이 무너져 내릴 듯한 폭우가 다가오는 걸,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계절과 계절의 사이에서 여린 것들이 처절하게 흔들리기에 끈으로 묶어주었습니다. 악착같이 매달려보지만, 흩날리는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도 입을 벌리고, 울먹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의 손길을 완강하게 뿌리칠 수록, 사라지지 않는 슬픔은 더욱 선명하게 존재하악다구니를 쓰는군요. 차라리 슬픔을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게 나을까요. 그렇다고 불행한 건 아니니 말입니다.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삶을 가볍게 살아보라 얘기하더군요. 하지만 가벼워지려할 수록 존재는 참으로 흐릿해져만 가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유쾌함과 즐겁지 않은 농담, 자아를 의식한 대화와 알맹이 없는 말들, 삶에 대한 성찰과 지워버리는 삶. 사이에 서서 무엇이 가벼운 건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잊어버리려 애쓸수록 죄책감과 비겁함, 그리고 지워내지 못하는 자기폄하의 늪은 빨간 눈을 부릅뜨고 숨막힐 듯한 중력으로 저를 하염없이 끌어당깁니다. 세탁기를 몇번이나 돌려보아도 얼룩진 슬픔은 지워지지 않고, 그늘진 존재만이 낡아지고, 해지기만 하는 듯 말입니다. 친구말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제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있었음을 명징하게 말해주는 기억들과 문장들로 저는 차라리 무거워지고, 침잠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슬픔은 살아가는데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삶의 질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있기에 우리는 기쁨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다가올 기쁨을 위해 기꺼이 온전한 슬픔으로 저는 락하겠습니다. 

빗방울에 흔들리는 카모마일이 안쓰러워 꽃을 따며 생각에 잠깁니다. 외롭거나, 힘들다는 감정에 불행이 포섭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극도의 짙은 습이 가득한 이곳에서 카모마일의 건강한 향기는 더욱 진하게 번져가는군요.

꽃들가득한 빗방울 속에서 눈물을 떨구지만, 결국 행복하고야 니다.


빗방울이 멈추어 갈 무렵, 사랑하는 친구가 딸기를 따겠다며 달려와 주었습니다. 딸기 때문인지, 저에게서 피어나는 슬픔의 기척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려와 준 친구가 한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빗물에 상처입은 딸기를 어떻게 해야하나 함께 갸우뚱거리다가 딸기잼을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러진 딸기를 깨끗이 씻어 설탕과 레몬즙을 넣고 한참을 뭉근하게 끓이다가 찬물에 한 숟가락 떨구어 보았습니다. 찬물에도 희석되지 않는 묽기가 되었을 때, 소독한 병으로 옮겨담았지요. 상처입은 딸기의 향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친구는 눈썹달이 된 눈을 하고서는 환하게 웃더군요. 슬픔을 눈물로 끓이고 또 끓여내니, 존재는 선명해져만 가는군요. 무엇에도 희석되지 않는 슬픔의 향이 가장 아름다운게 아닐까요.


그래요. 지금 저는 묽었던 딸기처럼 행복합니다. 행복하고 말구요. 아이가 응석을 부리듯이 불현듯 날아드는 슬픔을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슬픔에 취해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슬픔을 맴도는 건, 슬픔도 지나고 나면, 먹구름 사이에서 번져가는 햇발같은 추억으로 내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 주저앉는 나날들에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렇게 흔들리며, 다시 태어나, 농도 짙은 향기와 문장을 만들어가는 게 글쟁이의 소명아닐까요. '폴 발레리'의 말처럼 신은 인간에게 고독을 무한히 감당하는 능력을 넣어 주셨나봅니다. 눈물로 만든 딸기잼에 빵을 적셔 먹어봅니다. 친구 사이를 흐르던 무겁던 중력은 어느새 줄어들고, 달콤한 공기만이 은은하게 채워지는군요.


비가 그친 후, 친구와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커피를 들고서 평상에 앉아 호수를 바라봅니다. 육지들의 사이에 놓인 희뿌연 솜뭉치처럼 부풀어 오른 호수는 끝간데 없이 넓어 보이는군요. 빗물을 벗어나지 못한 호수가 처연해 보였습니다. 슬픔에 스스로가 잠식되어버리면, 자신을 향한 분노로 응고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굳어버린 분노는 손 쓸틈 없이 자신을 집어삼키며, 안개처럼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희멀건 우울로 번져가겠지요. 우울이 깊어지고, 번져갈수록 더듬거릴수 조차도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들어, 끝내 삶을 가벼이 여겨 버리는게 아닐는지요. 슬픔이 분노와 우울로 전이기 전에 맛있게 먹어보려 합니다.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비빔국수나 해먹자.'


빗물 가득 고인 텃밭에서 케일과 상추, 쑥갓과 깻잎을

툭툭 잘라왔어요. 잘라온 야채들에 잔뜩 매달려 있는 흙탕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고추가루와 고추장, 국간장과 다진마늘, 매실청과 식초를 넣은 양념장에 삶은 면과 함께 무쳤습니다. 매콤달콤한 향이 슬픔을 경쾌하고도 맛깔나게 버무려 주는 것만 같았지요.

그래요. 우리는 너무나 슬프고, 아파서 눈물을 뿌리며 빗방울을 뛰어다닐지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억척스럽게 먹고, 소란스럽게 농담하며, 크게 웃어버릴 줄 아는 일을 지루하리만큼 해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이 존재를 지워버리기 전에 아름다운 것들로 만들어 한상 차려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저녁 산책 길에 호수의 물결을 따라 달빛이 고요하게 스며드는 걸 보니, 내일은 햇살이 황홀하게 자리를 바꿔 앉을 듯합니다. 호수의 자욱하던 안개 속, 어느 언저리로 매번 격렬하게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쨌든 도망가지 않고, 지금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두렵지만, 순간순간 결정하면서. 슬픔에 온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은 살아가는 일에 있어 고귀한 영역이라 여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성숙해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한 걸까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서야 조금씩은 알 듯도 합니다. 슬픔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언제나 슬픔은 저에게 질문하는 것만 같습니다.


'너,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니?'


슬픔이 지나가고 나면, 조금은 더 저의 삶이 선명해지곤 합니다. 마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비온 뒤의 찬란한 저 하늘처럼 말입니다. 지금 제가 가장 두려운 건, 슬픔이 고갈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괜찮아도, 괜찮습니다.

덧. 주재료: 국수, 신김치, 케일, 치커리, 상추,

                    쑥갓, 양파, 오이

      양념장: 고추가루와 고추장 한 숟가락씩.

                    매실청과 올리고당 한 숟가락씩.

                    국간장과 다진마늘 반 숟가락씩.

                    식초 두 숟가락과 참기름, 통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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