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은 떴지만 무기력이 내 몸을 지배했다. 난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아이가 거실에 나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자기 손에 닿지도 않는 곳에 있는 잘라놓은 수박을 먹겠다며 낑낑거렸다. 결국 까치발로 꺼낸 수박은 처참하게 바닥에 쏟아졌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방금 눈을 떴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방선율! 엄마가 냉장고 문 열지 말랬지!!”
나는 또 눈만 껌뻑껌뻑거리는 아이에게 소리치며 화를 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격양된 목소리, 누가 봐도 씩씩거리는 표정이 아이에게 위협감이 될만했다. 순간 실수했다 생각했다. 아직 만 3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는 무섭고 두려웠을게다. 단지 그 아이는 수박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엄마의 모습은 한순간에 호랑이로 바뀌었다.
‘화를 내지 말고 단호하게 얘기해.’
‘애 앞에서 울지 마.’
‘엄마가 흔들리면 아이는 불안해져.’
이런 말들을 들어서일까, 가끔 터져 나올 때도 있지만, 나는 엄마가 된 후 감정을 숨기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특히 불안한 마음은 아이를 더 불안하게 만든단 말에 스스로가 단단해지려 노력했다. 공황발작이 오면 아이들이 없는 곳으로 숨었고, 불안함이 올라오기도 전에 약을 먹었다.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늘 아이들 앞에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괜찮은 척, 아닌 척하면 할수록 나 자신은 무너져갔다. 억눌려있던 감정이 터지는 순간도 점점 잦아졌다. 참는다고 능사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감정을 숨긴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슬픔, 기쁨, 외로움, 짜증, 두려움 그대로 자연스럽다. 우리는 이 마음의 메시지를 오롯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서운함에서 비롯된 화인지, 외로움에서 비롯된 눈물인지…. 이것이 감정 표현의 시작이다. 그래야 내 감정을 아이와도 나눌 수 있다.
“오늘 엄마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속상해. 잠깐만 조용히 있어줄래?”
내가 왜 우는지, 왜 속상한지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예민해서 엄마의 표정, 말투, 분위기 등의 비언어적 요소로 엄마의 기분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얘기해 준다면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아이도 화가 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나와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러면 감정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 된다.
엄마도 사람이다. 억지로 숨어서 울지 말고, 속상해하지 말자.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표현하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