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음은 가득 하나 그 마음이 스킨십과는 별개인 어쨌든 화목, 서먹한 집안의 장녀로 어른이 된 지금은 스킨십 하면 사고가 정지되는 뚝딱이가 되어버렸다. 먼저 터치를 시도하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고 ‘굳이? 날도 더운데 왜 자꾸 껴안으려 해’라는 의문이 들어 받는 것도 익숙지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은 표현을 해야 상대에게 전달이 된다지만 스킨십 외에도 많은 방법들이 있지 않은가.
‘고마워, 수고했어, 힘내자’ 등의 격려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에 난이도가 쉬운 편이다. 하지만 ‘사랑해’는? 입을 떼는 것도 스킨십도 쉽지가 않다. 사랑이란 감정이 익숙하지 않아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랑을 떠올리면 저 멀리에 있는 구름처럼 보기에는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막상 손에는 닿지 않는,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쉽게 내뱉을 수도, 함부로 품을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 무서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사랑은 내가 몰랐던 마음까지 온전히 까발려지게 되므로 그걸 상대가 알아차릴까 봐 두렵다. 손을 잡는 순간 한 겹, 포옹으로 또 한 겹, 스킨십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점점 나의 한 겹 한 겹이 벗겨지며 ‘사랑해’가 입 밖으로 나오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내 마음을 다 내보이게 된다.
마음을 다 보여주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익숙지 않은 감정을 품는 것도 어려운데 표현까지 하려면 번지점프대에 선 것처럼 망설이게 된다.
그렇다면 평생 스킨십을 안 하고 살 것인가. 아무도 나를 만지지 못하게 거리 두기를 하며 살 수는 없다. 다만 용기가 아주 많이 필요할 뿐이다. 특히 제일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더욱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아끼는 마음을 잘 알기에 더 잘 보이려 굳이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지인이나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대에게는 의무처럼 이런저런 호감의 표현을 한다. 그들과는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므로 불편해도 말이나 스킨십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어필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포옹 한 번 하려면 뚝딱이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사실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경우 스킨십에 관해서는 오랜 시간을 어색해하다가 이제 와서 다 큰 어른들끼리 껴안으려니 서로 눈치만 보다 쓰다듬는 걸로 다음 기회를 모색한다. 가정환경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머리가 커서 이해하게 된 것은 부모님 그들 또한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왔고 그럼에도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내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음이 그 사랑의 증거 아니겠는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랑 길을 걷던 중 횡단보도 신호 때문에 급하게 뛰어야 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보호 본능에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팔짱을 끼고 엄마 쪽으로 끌어당겨 뛰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는 풀까 싶었는데 자연스레 계속 팔짱을 끼고 걸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라는 식의 핑계로 부모님과 스킨십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가 와서 우산 하나로 같이 써야 할 때, 인파가 많은 곳에서 서로를 보호해야 할 때, 엄마의 기미 가득한 팔을 쓰다듬을 때, 탈모약 효과가 좋은지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등등 ‘기왕 이렇게 됨 김에’라는 명분을 붙일 수 있는 상황은 생각보다 많다. 그 명분을 빌어서라도 부모님과 살이 맞닿을 수 있는, 그 접촉을 통해 조금이나마 나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여자인 친구들은 서로 손 잡고 팔짱 끼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하는데 나와 친구들은? 그 빈도가 많지 않아도 하긴 한다. 추운 겨울 손이 시릴 때, 매서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올 때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꼭 붙어있는다. 생존 본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과 그렇게 붙어있을 수 있을까.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극한 상황에서 서로를 찾는 것이다라는 변명을 장황하게 써보았다. 평소에도 애정을 표현해 주면 좋으련만 갑작스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안기고 살갑게 굴면 ‘무슨 일 있니? 술 먹었니?’ 소리를 들을게 뻔해서 상상회로를 돌리다 고개를 저으며 ‘살 던 대로 살자’ 하며 다시 거리를 두고 뒷짐을 진다. 여기서도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마법을 쓰자면 새로 한 헤어스타일이 참 잘 어울려 쓰담거리고 싶을 때, 살이 너무 빠져 핼쑥해진 얼굴을 매만져 주고 싶을 때, 배에 가스가 찼다며 뽈록 나온 아랫배가 귀여워서 만져보고 싶을 때 등등 소소한 순간에 적용할 수 있다.
흔한 사랑의 표현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순간에도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다. 만약 그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대들과 닿았던 곳에 사랑을 가득 불어놓았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