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의 거실 창문 밖에 작은 난간이 있다. 에어컨 실외기를 달기 위해 설치한 작은 난간이긴 하지만 작은 화분을 몇 개 놓을 정도의 공간은 되겠다 생각하여 좋아하는 채소인 방울토마토를 키우기 시작했다. 식집사는 처음이라 기본 지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한 화분에 씨앗 여러 개를 뿌려 화분 가득 채워 심었다. 하필 식물을 키우기 가장 좋은 계절에 심었던 터라 씨앗은 봄의 정기를 한껏 받아 무럭무럭 자라 싹을 틔웠다.
싹이 트기 시작하면서 나의 무지함도 같이 드러났다. 서울에 가득 찬 집처럼 새싹들도 빈틈없이 자라기 시작했다. 말 못 하는 식물이지만 ‘우리 좀 이사시켜줘!’라는 불만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화분 몇 개를 더 사 와서 대대적인 분갈이를 시작했다. 삽으로 흙을 덜어내 보니 위로 자란 새싹들은 손톱만 한 크기인데 밑으로 뻗은 뿌리는 세 배나 길었다. 각각의 뿌리들은 더 이상 공간이 없어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비좁은 흙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살 길을 찾아내느라 이리저리 꼬였을 것이다. 지금은 각자 화분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자랐고 성장속도가 더디다 싶어 흙을 살짝 파내보면 화분 전체로 뿌리가 퍼져있어 더 큰 화분으로 이사를 시켜줬다.
작은 방울토마토의 뿌리도 이렇게나 길고 넓게 뻗어나가는데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나무의 뿌리는 얼마나 더 단단하고 깊게 뻗어나갈까. 자신의 자리가 확보만 된다면 에너지가 있는 한 계속 뻗어 나갈 것이다.
식물들은 옆에 누가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경쟁하듯 자라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자리에서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뿌리와 줄기, 잎들을 성장시키는 데에 집중할 뿐이다.
뿌리가 얽히면 얽힌 대로, 다른 뿌리를 파괴하며 싸우지 않고 또 다른 공간을 찾아 자신의 갈 길을 묵묵히 간다. 때로는 얽힌 뿌리가 서로를 지탱해주기도 한다. 매서운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하나가 쓰러지지 않게 서로를 버틸 수 있게 해 준다.
키 큰 나무가 작은 나무의 햇빛을 가린다면 작은 나무는 시들어 죽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작고 성장은 더디지만 큰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적은 양의 햇빛으로도 살아남는다. 큰 나무처럼 자라기 위해 욕심을 내지 않는다. 사람도 식물처럼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에너지를 온전히 나의 삶에 다 쏟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면에서 인간의 삶은 참 복잡하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생존의 과정은 단순하지만 인간의 생존에는 뿌리보다 더 복잡한 생각, 감정, 관계들이 얽혀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에게 생존이란 좀 더 고차원적인 문제다. 사회라는 집단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타인과 비교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뿌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기 쉽다. ‘이 자리가 내가 뻗을 곳인가. 아니야 저기인가’의 고민을 꽤 오랫동안 할지도 모른다. 깊이 박혀 있지 못하고 얕게 여러 갈래로 펼치다 금방 그칠 비에도 쉽게 넘어진다.
넘어지고 휩쓸려 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이 보인다.
그곳은 함께 자라는 숲과 같은 집단일 수도 있고, 그곳은 홀로 우뚝 서야 하는 동산일 수도 있다. 전자는 외롭지 않겠지만 옆 나무들과 같은 흙을 공유해야 하고 때로는 먼저 웃자란 나무에게 햇빛을 빼앗길 수도 있다. 반대로 후자는 의지할 곳 없이 외롭지만 주변 환경이 제공해 주는 것들을 온전히 혼자 누릴 수 있다. 나무는 스스로 운명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어떠한 곳에 뿌리내릴지를 본인이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각자의 상황에 맞는 곳에 뿌리를 내리면 된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것들, 특히 오랫동안 꾸준히 해온 것들, 꾸준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다시 돌아와서 하고 있던 것들을 돌이켜 보면서 어느 곳으로 뿌리를 뻗어야 할지 방향성이 잡혔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그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달려온 삶이었지만 결국에는 ‘나’로 집결된다. ‘나 좀 봐줘. 나한테 신경 써 줘. 나에게. 나에게’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타인에게 알아봐 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제는 어디든 뿌리를 내려 이기적이더라도 주변 상황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나의 성장을 이루는 데에 쓰고 싶다.
옆 나무와 뿌리가 얽히면 얽힌 대로 또 다른 빈 공간의 흙을 찾아 뻗어나가면 되는 것이고, 외롭게 혼자 서있어야 한다면 그건 그대로 주변 환경을 온전히 혼자 누릴 수 있어서 좋고.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오로지 나의 뿌리를 깊게, 아주 깊게 뻗어나가는 것에만 집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