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왜 '세종'이었을까.
세종은 '묘호'다. 묘호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즉 왕이 죽기 전까지는 쓸수 없다. 따라서 세종대왕 본인은 자기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세종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묘호는 죽어야 지어지는 이름인 만큼 묘호에는 그 왕의 생전 통치를 평가하는 뜻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다. 흔히 알고 있지만, 왕조의 최초 통치자는 '태조', 왕조를 굳건하게 다진 인물은 '태종' 이런 식이다.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은 죽은 뒤 '중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흔들리는 왕조를 안정화시킨 왕에게 붙이는 칭호다. 물론 역량이 떨어지거나 욕을 먹는 왕의 경우에는 안좋은 이름이 들어간다. 따라서 왕의 이름만 가지고 후세인들이 이 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각설하고, '세종'은 묘호 중에 상당히 좋은 의미다. 묘호에서 가장 최고가 '성(聖)'이고, 그 다음이 태(太)인데, 세(世)는 그 다음 정도로 여겨진다. 세종이 세종이 된 것은 아들 문종이 결정했다, 문종은 세종이 사망한 뒤 신하들로부터 "세종이 좋겠습니다"라는 건의를 듣고 "그래 세종으로 하자"라고 한다. 다음날인가 다다음날인가 일부 신하들이 "세종에는 나라를 중흥했다는 뜻이 있는데 그정도는 아니지 않을까요. 문종이 어떨까요"라고 건의하는데, 문종은 "야 4군6진 있잖아. 세종으로 하자"라고 잘라버린다. 그리고 이 문종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세종은 세종이 됐다.
말하자면 세종은 '4군 6진'때문에 세종이 됐다. 후임 문종을 비롯한 당시 조선 지도층이 세종의 가장 중요한 치적으로 4군6진을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후세인들은 세종의 가장 큰 치적으로 한글을 생각하지만 당대인들은 다르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왜 '4군 6진'이 세종의 핵심 치적이었을까. 이 점을 파고보면 당시 조선조정 수뇌부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일단 조선 왕가는 함경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집안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조선 왕실은 당시 함경도 면적의 1/3를 직할 영지로 가지고 있었다. 북방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셈이다.
북방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북방을 안정화 할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마련이다. 태조 이성계도 태종 이방원도 이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세종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 생각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세종은 이 '북방 안정화' 방책을 역사를 통해 구했다. 세종의 통치기간 중에 지속적으로 한 여러 사업 중에 '고려사'가 있다. 전임 왕조인 고려의 역사를 총괄 기획해서 편집했던 건데 세종은 유난스레 이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의 만년에 그가 가장 주력한 사업이-약간은 취미생활이었지만- 한글과 이 고려사 편찬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려사 편찬을 전후한 시점에 세종은 윤관의 동북9성과 관련한 언급을 자주 한다.
고려 예종 연간에 벌어진 윤관의 동북9성 정벌 사업은 반쯤은 예방전쟁격 성격을 띄었다. 강대해진 여진족의 융성을 알아차린 고려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경도 일대로 진군한 건데 이때 고려 조정은 개마고원을 장악하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고려조정은 개마고원을 통한 병력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해안일대만 석권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진족은 개마고원의 험난한 산악을 이용해 해안일대로 동시 강습, 고려군을 여러갈래로 쪼개 포위한다.- 이 전략이 정확히 1000년 뒤에 반복되는데 바로 이게 장진호 전투다. 개마고원의 진격 가능성을 오판한 미군이 아무생각없이 올라갔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해 각개 격파 당할 뻔했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미군은 10여만명의 피난민과 함께 부산으로 부랴 부랴 철수하고, 이 피난민 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버지가 있었다.- 고려군은 이 각개 격파의 전술적 위기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한다.
세종은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을 분명히 읽었을께 뻔하다. 실록 기록을 보면 세종이 고려가 진격한 동북9성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려사를 통독하지 않으면 절대 저런 말이 안나온다. 세종은 고려사를 읽으면서 개마고원의 중요성을 깨달았던게 분명하다.
결국 판단은? 개마고원을 완전히 소유해야 한다는 거다. 세종이 미쳤다고 그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별로 이득도 없는 땅쪼가리를 차지하려고 그런 무리수를 둔게 아니다. 세종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잡으려 한 것은 한반도 안보의 핵심은 북방 안정이고 이 북방안정을 위해서는 개마고원을 소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반드시 장악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은 압록강 전선 포기를 권유하는 신하들에게 "이 땅은 절대 포기할수 없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는 정말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에 있었다. 오늘날 북한을 보면 알듯이 압록강과 두만강 뒤에는 별다른 배후지도 없었고 식량생산이 좋거나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즉 다 밑에서 준비해서 위로 올려 보내야 한다. 고려가 결국 동북9성을 포기한 것도 이 부담을 이길수 없어서였다.
세종은 이 문제의 답을 화약 대량 생산에서 찾는다. 화약을 대량 생산하고 이를 운용하는 전문 병력을 만든 뒤 이를 통해 전선을 유지하려 한다. 화약 대량 생산을 통해 적은 병사로도 큰 방어선을 둘 수 있게 한거다. 후방 보급이 원할하지 않은 상황에서 세종은 보급을 늘리기 보다는 전선의 정예화를 택했다. 이 세종의 생각을 이해한게 문종이었고 그래서 문종의 재위기간 때 신기전이 나온거였다. 문종이 아버지의 묘호를 '세종'으로 정한건 이 개척 때 본인도 옆에서 실무를 총괄하며 중요도를 이해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Ps)세종은 화약 대량 생산을 통한 국경 안정을 북방에만 하지 않았다. 세종은 화약 대량 생산으로 돈과 인력이 좀 남아 돌자 이걸 토대로 남해안 수군 확대 사업을 실시한다. 북방과 남방전선 모두의 안정화를 꾀한거다. 이걸 성공하기 위해 중세시대로는 말도 안되는 화약 대량 생산 과 대규모 상설 수군운영이라는 희대의 미친 짓을 기획 하고 성공 시킨 사람이 세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