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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Sep 02. 2022

오나라와 백제는 같았다.

짧은 옛이야기

김훈은 '대한민국 남자들은 삼국지가 다 망쳤다'고 한탄했지만, 때로는 삼국지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도 그렇다.


 삼국지의 세나라-위.촉.오- 중 가장 존재감이 떨어지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나라는 오나라다. 그러다 보니, 오나라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오나라 시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관우의 죽음으로 끝난 형주 공방전이 대표적이다. 유비의 분노와 이릉대전으로 이어진 형주 공방전은 오나라. 특히 손권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만 탐해 대사를 그르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형주공방전이 결국 촉-오 연합을 망가뜨려 결과론적으로는 위나라 우위 구도를 정착시킨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때문에 손권이 작은 이익을 탐했다는 지적도 올바르다. 그런데 손권은 자신이 작은 이익만 탐한다는걸 몰랐을까?

 손권은 적벽대전과 뒤이은 조인과의 전투을 수행했고,  주유의 청을 듣긴했지만 유비에게 형주 일부의 땅을 떼어주고 자신의 여동생과도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촉-오 동맹론자인 노숙을 오랫동안 도독에 유임시켰고, 그가 죽자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손권이 형주를 빼앗고 관우의 뒤통수를 갈긴것을 단순히 그의 시야가 좁은탓이라고 평하긴 곤란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시야가 좁아진건 맞지만, 그건 그의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다. 


 손권의 시야가 좁아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손권의 시야가 '왜' 좁아졌느냐에 주목해야한다. 

 이건 당시 오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키면 더욱 분명해진다. 오나라는 호족들의 연합체였다. '사성'으로 대표되는 오나라 대표가문 4곳이 손권과 연합해 세운 나라라는 특성이 강했다. 각각 장씨. 육씨. 주씨. 고씨였다. 연의때문에 착각을 하곤 하는데 손견의 가문은 이 지역에서 오래된 유력 호족이 아니었다. 기록상 손견은 중앙정부에 소속된 하위군관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오의 4성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는 불문하고. 이들의 대표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육손이었다. 이 육손은 여몽과 함께 형주공방전을 치뤘고 이릉대전의 주역이기도 하다. 

손권의 초상화

 육손으로 대표되는 오의 4성이 형주공방전에 적극적이었던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 호족들이 천하통일 보다는 가문의 안위에 더 몰두한 결과라고 본다. 위나라 멸망을 위한 촉나라와의 연합보다는 가문의 안위를 통한 오나라의 존속에 더 신경을 썼던 걸로 봐야한다. 무게중심의 축이 진전보다는 보존에 있었다.

 이 선택을 옳다, 그르다로 말할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싶어하는것만 보고 자신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판단한다. 오의 사성도 여기서 자유로울수 없다. 이걸 잘못됐다고 탓하는건 부지불식간에 촉나라에 경도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볼수도 있다. 손권은 형주를 차지하기전 수차례나 합비를 노리다가 매번 실패하는데, 이 합비라는 지역은 위나라 중심-낙양. 허창-을 노리기에는 좋지만, 사방이 평지라서 방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오나라 호족들의 눈에 합비에 병력을 꼴아박는 손권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이 오나라의 정치적 환경과 비슷했던게 바로 한반도의 백제였다. 백제의 왕족들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귀족 가문이었다. 고주몽의 후손인 이들은 한반도 중남부에 있는 토착세력들과 연합해 백제를 건국한다. 보잘것없는 회남지방의 군인이었던 손견. 손책이 양주호족들과 연합해 세운 오나라와 유사하다. 


 손권의 실패와 형주공방전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뒤 보이는 태도와 비슷하다.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금강까지 후퇴한 백제왕실은 이후 고토회복을 왕가의 제1과제로 내세웠다. 한강유역을 상실한 백제왕실은 이후 금강일대의 유력 호족집단과 손을 잡고 국가를 경영하는데. 이들을 대성팔족이라 부른다. 사서에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추정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대성팔족들이 오의 4성들과 마찬가지로 백제왕실의 한강유역 진출을 마뜩찮게 봤다고 본다. 백제는 동성왕. 무령왕. 성왕등이 계속해 한강에 진출했지만 장기간 이 지역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기간 무력투사 및 영역확보는 대량의 물자보급없이는 안된다. 백제의 장기간 한강유역 실패는 대성팔족들의 사보타주 때문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손권이 오의4성들이 보인 미적지근한 태도로 합비에서 형주로 창을 돌린 것처럼 백제도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6세기 중반 포기한다. 사서는 성왕이 한강유역에 군대를 진출했다가 물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기술을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한 뒤 백제를 기습한 것으로 설명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물자보급의 한계를 느낀 백제가 자발적으로 한강유역에서 철군하고 이 빈 지역을 신라가 차지한것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맞다면 성왕이 이후 신라와 싸우는 관산성 전투가 바로 백제의 '형주 공방전' 이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손권이 동맹을 배신했고 관우를 죽인것은 통합되지 않는 오나라의 결속력을 생각해볼때 최선의 방책이었다. 백제 성왕의 입장에서도 대성팔족이 반대하는 한강유역 점령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신라의 '형주'인 소백산맥 일대를 점령하는 방책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손권과 성왕의 차이점은. 손권에겐 여몽과 육손이 있었지만 성왕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성왕이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 오나라와 백제가 같으면서도 다른 결말을 맞게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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