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모리 미술관

무서운 그림(怖い絵)

by 돌레인

2017. 11. 16

남편은 다시 치바로 출근을 하고, 나는 우에노로 향했다.


출근길의 수많은 직장인들을 뚫고 당도한 우에노 미술관 앞에서 나는 또 경악했다!! 개장 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 다양한 연령층의 일본인들!!@.@


예전 도쿄도 미술관의 <터너전>에서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숨이 턱 막혔었는데 이번엔 더 심해 보였다.

대체로 일본은 미술관을 찾는 수요가 많아 기획전의 질도 그만큼 좋다. 골치 아픈 현대미술보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인상주의나 좀 더 교양을 높일 수 있는 고전주의 미술이 일본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것엔 ‘자포이즘’이 여전히 한몫하고 있는 듯싶다.


암튼 그냥 돌아갈 수 없어서 표를 일단 끊고 줄을 선후 1시간을 기다려 입장했다. 역시나 전시장 안은 출퇴근길 지하철 안처럼 사람들로 꽉 차 그림을 감상하는데도 서로 몸을 밀착해 천천히 이동해야 했다. 목욕과 머리 감기, 향수 뿌려오기는 필수~~ㅋ


이 전시회를 주최한 작가 나카노 교코(中野京子)가 ‘무서운 그림(怖い絵)’ 시리즈를 쓰게 된 계기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이 스케치 때문이었다. 기요틴(단두대)에 오르기 전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참한 몰골을 그린 스케치지만, 한때 화려하고 아리따웠던 때의 철부지스런 모습은 오간데 없고 꼿꼿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진짜 왕비가 보인다. 그런 모습이 다비드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거의 2시간을 돌아봤는데 역시 압권은 폴 들라로슈의 <9일의 여왕> 혹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었다.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가의 네 번째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독실한 영국 성공회 신자지만, 그녀와 대립관계에 있는 왕녀 ‘메리 1세’는 로마 가톨릭을 고집했다. 제인 그레이가 즉위한 지 9일 만인 1553년 7월 19일, 메리 1세가 런던에 입성하자 제인 그레이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히게 되고 이듬해 참수당한다. 그녀의 나이는 불과 16세였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듯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제인 그레이 역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어디에 자신의 머리를 두어야 할지 손으로 더듬자 사제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이끈다. 곧 여왕의 목을 내려칠 사형집행인의 얼굴엔 그녀를 향한 안쓰러움마저 감돈다. 집행인의 허리엔 단검이 걸려있는데, 도끼로 한 번에 머리가 잘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란다. 단두대 앞에 깔린 지푸라기들은 피 받이용이다. 여왕을 보살피던 두 여인들 중 한 명은 실신해 있고, 또 한 명은 기둥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다.

전시실 한 면을 다 차지한 이 그림 앞에서 나도 그만 눈시울이 붉어져버렸다...

사진 촬영과 메모가 일체 되지 않아 아트샵에 들러 인상에 남은 그림들을 엽서로나마 구입했다.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909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인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바다괴물인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며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인데, 세이렌들이 입을 크게 벌리며 노래 부르는 모습이 처절할 정도로 기둥에 묶인 오디세우스는 무표정이다. 아니 아예 두 눈동자의 방향이 제각각이다. 그를 의지해 귀를 막고 힘차게 노를 젓는 사공들의 표정들에도 긴박감이 깃들어 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오디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키르케>, 1891

키르케는 일전에 ‘테이트 누드전’에서 봤던 ‘스킬라’에도 배경 이야기로 등장했는데, 어여쁜 스킬라를 흉측한 괴물로 만든 마녀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기나긴 여행을 하던 중 마녀 키르케가 살고 있는 아이아이에 섬에 도착한다. 키르케가 권하는 술잔을 받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모두 돼지로 변해 버리지만, 오디세우스는 앞선 모험 중에 받은 해독제 덕에 화를 면하고 키르케를 검으로 위협해 부하들을 사람으로 되돌린다. 서로에게 반한 오디세우스와 키르케는 이후 1년간 부부로 지내다 오디세우스가 섬을 떠나려 하자 키르케는 세이렌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비법을 전해준다.

그림 속 키르케의 발 밑엔 돼지로 변해버린 오디세우스의 부하가 쓰러져 있고, 키르케 뒤쪽 거울 속 오른편으로 예의를 갖추고 있는 오디세우스가 보인다.


찰스 심스의 <그래서 요정들은 옷을 입고 달아났다>, 1918-19

산업혁명 시대 영국 화가인 찰스 심스의 그림들은 르노와르처럼 색채가 부드럽고 눈부시다. 순조로운 화가 생활을 하던 중 1차 세계대전에서 큰 아들을 잃고, 심스 자신도 종군화가로 참전했다가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후 돌아와 그린 그림이다. 이후 그는 정신이상으로 물에 빠져 자살했다. 화사함 뒤에 감춰진 우울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전시와 관련된 나카노 교코의 책과 북커버도 구입했다.


책 뒤엔 일본 추리소설의 대모라 일컫는 미야베 미유키(좌)와 나카노 교코(우)의 대담이 실려있는데 평범하고도 친근해 귀엽기까지 한 두 분의 모습에 그만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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