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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은 Oct 22. 2021

번데기

 

애벌레는 나비로 탈바꿈을 하기 위해 번데기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녹인다. 번데기 안에서 액체 상태가 된 애벌레는 자신의 몸을 새로이 짜맞춘다. 그 몸이 다 맞춰져 나비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 오래 전 애벌레였던 자신이 알을 뚫고 나왔던 것처럼 고치를 뚫고 세상에 나온다. 세상에 나온 나비가 웅크린 날개를 펴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를 때 성장은 비로소 완성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과정의 중간단계로 삼았던 대학원 진학은 나에게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나아가는 과정과 같았다. 아직은 애벌레 수준인 나와 나의 글이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완전히 녹아 재조합되리라 기대했다.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얼마 동안은 괴롭기도 하겠지만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펼치게 될 날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번데기가 될 수는 있을까.


손바닥문학상 수상소식을 전해들은 바로 다음 날, 나는 대학원 면접을 보러 갔다. 전날의 소식으로 마음이 조금은 들뜬 상태였다. 1년 전 문화센터에서 소설창작 수업을 처음 들은 뒤로 지금까지 끝을 낸 소설이라고는 단편 다섯 편 정도가 전부였다. 그 가운데 읽을 만한 글은 두 편 정도였다. 그 두 편 가운데 한 편이 상을 받았다. 그 비율을 생각하면 번데기로의 성장을 조금은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마침 학교도 지하철 환승 없이 바로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우연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면접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었다. 날씨가 추워져 그 위에 코트까지 챙겨 입었다.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입은 양복이 어색하던 차였다. 예술(!)을 배우러 가는 마당에 너무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는 격식부터 따르는 일도 필요하니까. 어차피 옷차림이 평가항목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마음 편히, 무난하고 무탈하게 다녀오기로 했다.


여유 있게 면접장에 도착했다. 캠퍼스를 한 번 돌아보고 싶었는데 혹시나 길을 잃거나 순서를 놓칠지도 모른단 생각에 면접을 보는 강의실 주변만 한 번 둘러보았다. 오랜만의 대학 캠퍼스였다. 학부시절 다니던 대학 생각이 났다. 이 공간이 그 시절을 지낸 공간처럼 나에게 익숙한 곳이 될 수 있을까. 벽에 걸린 학과 행사 포스터와 대자보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 뒤 면접이 시작되었다. 수험번호에 맞춰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태연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어쩐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곧이어 나의 순서가 되었다. 면접을 진행하는 학생들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안내생이 코트를 입고 들어갈 것인지 묻길래 그러겠다고 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 안에 입은 양복을 보여드리는 쪽이 면접에 더 유리하기 때문일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날도 추운데 무슨…. 기왕 양복을 챙겨 입고 왔으니 코트 위쪽 단추를 풀어 안에 입은 옷이 살짝 보이게 매무새를 다듬는 정도로 면접실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안내생이 내 수험번호가 적힌 커다란 스티커를 내밀었다. 나는 그 스티커를 내 배 쪽에 붙였다. 쇼미더머니에라도 나가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나는 면접실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면접을 보기 전 대학 홈페이지에서 학과 교수님들을 찾아보았었다. 여섯 명의 교수 가운데 네 명이 남자였다.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학계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모양이라 생각했었기에 면접실에 들어선 나는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명의 면접관 가운데 한 명만 빼고는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홈페이지가 업데이트가 안된 모양이었다. 교수님들의 작품과 사진으로 나름 내적 친밀도를 키워왔는데 오늘의 면접과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내 앞의 면접관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누구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마스크를 쓴데다 바깥 복도보다 면접실이 따뜻한 탓에 안경에 김이 서려 계속 끼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면접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면접 질문은 예상한대로 나왔다.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얼마나 글을 썼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등 평이한 질문들이었다. 미리 제출한 자기소개서와 단편소설로 어느 정도 평가가 이뤄졌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낸 소설에 대한 질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 가운데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면 그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터였다. 내가 받은 평이한 질문은 내 소설에 어떤 흥미로운 부분도 없었다는 반증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특출한 점이 없는 소설이었다. 그래도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정도는 물어봐 주실 줄 알았는데…. 저 그 소설 말고 원서 접수하고 바로 다음주에 썼던 소설로는 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지금이라도 그 소설로 평가해주시면 안될까요.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나는 결국 그 평이한 질문들에 제대로 된 답변 하나 하지 못했다. 왜 글을 쓰려고 하느냐는, 적당히 넘어갈 줄 알았던 질문에는 집요할 정도로 대답을 피하기까지 했다. 내가 하려는 답변들이 모두 우습게만 여겨졌다. 내 앞에 계신 분들은 모두 나비가 된 분들이었다. 그 분들 앞에서 진지한 척, 심각한 척 해봐야 번데기도 되지 못한 애벌레의 꿈틀거림으로 보일 뿐이었다.


면접이 다 끝나고 건물을 나왔을 때, 바깥은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둑했다. 집에 바로 가기 아쉬운 마음에 캠퍼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달이 밝았다. 번데기 속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빛이 저와 같을까. 번데기가 된다면 저 빛이 간절해지지 않을까. 밤이 되니 날이 찼다. 이제 집에 가야했다. 가야 할 길이 아직은 많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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