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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자 Oct 07. 2021

내일 나의 직업은?-2

제 1화 악으로 깡으로 나는 영화감독


초, 중학교 때 아이돌을 좋아했던 팬들은 한 번쯤 읽어 봤을 법한 팬픽을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읽고 쓰던 탓일까? 아니면 혼자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황극을 즐겨 해서일까? 어느 날 문득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상도 많고 글 쓰는 게 재미있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영화감독이 더 멋이 있었던 것 같다. 밑도 끝도 없이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설쳤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18살의 나는 이미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끝낸 상태였고, 대학을 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영화가 하고 싶다는 말에 멘토 같은 수녀님의 추천으로 서울시 용산구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미디어 센터 스스로넷 영화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짜고짜 전화했다. “아 저 영화동아리에 들고 싶은데요.” 

전화 너머로 환영하며 반기는 목소리를 기대 했건만. “홈페이지에 나온 메일주소 보이시죠? 거기로 자기소개서 보내주세요. 그리고 몇 시까지 나오세요.” 퉁명스럽게 말하고 전화를 끊길래 내가 뭐 잘못한 건가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다. 

내 나이 18살 인생 처음으로 면접이었다. 근데 갑자기 면접관이 냉장고 앞으로 가더니 마음에 드는 아이스크림을 고르라고 했다. 순간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도 면접인가 싶었다. 동아리 면접관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면서 영화동아리에 왜 들어오고 싶은지 물었다. 

그러면서 말끝에 “이 영화가 너네 선배들이 만든 영화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 합격했구나’ 생각했다. 합격했다고 말도 안하고 애매모호하게 선배들이라는 말에.

그렇게 영화동아리 강오 샘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퉁명스러웠고 만사 귀찮아 보였던 면접관이 영화동아리 Agro 담당 지도교사라고 했다. 

지도교사가 괴짜 샘이라서 그런지 동아리 일원들도 괴짜 같았다. 보통 누가 신입생으로 들어가면 텃세를 부릴 법도 한데, 얘들은 좀 특별했다. Agro 친구들은 독특했던 게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보았던 친구들과는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각자 다른 학교인데도 잘 어울리며, 학교생활도 하느라 힘들 텐데 일주일에 두 번씩 꼭꼭 동아리에 참석하는 자세가 신기했다.

그렇게 나는 영화동아리에서 처음 포지션으로 조연출을 맞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쓴다고 밤새우고 서로 머리 맞대고 쓰고…

2006년 18살 여름 첫 촬영지는 서울시에 위치한 노원이었다. 인천에서 살았던 나는 노원에서 우리집까지 편도만 2시간 30분이 훌쩍 시간으로 버스 여러 번과 지하철 여러 번으로 첫 촬영의 임무를 시작했던 거 같다. 

당시 첫 임무가 조연출인지라 연출을 맡은 친구를 잘 보조하면서 일명 연출부 잡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연출인 민기는 나보고 세 보인다며, 노는 애 역할로 출연하라고 했다. 처음엔 싫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네가 우리 동아리에서 노는 애 역할 할 만한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라며 해달라고 했다. 실제로 학교 다닐 때 그런 적도 없었는데, 어찌 해야 하나 싶었고, 그렇게 단역이라고 했지만 조연급으로 비중이 나름 높았던 발연기를 쏟으며 조연출 겸, 주인공 단짝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밤샘작업이라는 영화 촬영을 하며 힘들기 보다는 나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 공부보다 두말하면 잔소리로 재미있었고, 영화감독이 되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에 우리는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 녹음장비를 하는 방법, 연기 등 다양한 걸 배우면서 우리만의 진지한 세계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서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피드백도 해주고, 만나면 어떤 말을 해줄지 생각하고, “이런 메시지가 담긴 게 맞냐”라는 의견들을 나누고 “이 시나리오를 쓴 의도가 뭐냐”라고 말하며 토론 같은 시나리오 회의 시간으로 우리는 진지했었다.

우리가 만드는 작품이 TV에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고, 정말 영화가 좋아서 시작한 친구들이었다. 연애는 영화로 배웠다는 도봉구에 사는 민기와 제2의 쿠엔티타란티노를 꿈꿨던 안산 토박이 규철이 숫기가 없는데도 시나리오만 쓰면 다른 면이 보였던 신림 사는 아름이 등 10명 정도가 넘는 친구들이 각자 맡을 수 있는 포지션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그렇게 동아리를 들어간지 두세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동아리 수습을 통과하려면 첫 영화를 찍을 때 25컷 이내에 찍을 것, 단 대사는 없이 내용이 전달될 것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수습시나리오에 몰두하고 있었다. 

선배들도 통과를 못해 영화를 찍고 싶어도 못 찍었다는 수습작을 생각보다 나는 일찍 통과를 하게 되었고, 카메라와 녹음 장비 하나로 당시 초등학교 다니던 남동생을 배우로 두고 그 18살 어린 아이가 당돌하게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 학교 몇 시간만 빌려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뭣도 모르니까 더 용감하게 다가갔던 거 같다.

그때 나의 첫 작품의 내용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장애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는 괴롭힘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 던 중, 자기 처지와 비슷한 민들레를 보게 되었는데, 힘없고 가녀린 민들레가 바위틈에서 힘들게 자라난 모습을 보고 지켜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라는 내용으로 그렇게 첫 작품을 찍었다. 


2006년 첫 영화 촬영 슬레이트



그 뒤로 나는 Agro에서 총 4작품 정도 연출을 맡았고 촬영감독, 녹음감독, 제작, 조명팀, 미술감독, 분장감독 등 다양한 포지션을 맡으며 각자의 영화를 완성시켜줬던 거 같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감독이라는 큰 꿈을 꿨고, 칸에 갈 거라는 큰 꿈을 가졌던 악으로 깡으로 친구들이었다.


2009년 특수분장 포지션으로 영화작업을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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