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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자 Oct 07. 2021

내일 나의 직업은?-4

제3화 Before After는 뚜렷하게 바꿔드립니다.

CJ를 박차고 나왔던 나는 그 힘든 시련을 겪으며 임파선염으로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금 뭐 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심정으로 9개월의 경력도 경력이라고 작은 회사의 콘텐츠를 운영하는 회사의 모집 공고를 보고 경력직으로 지원했다. 면접을 보러 간 난 CJ에서 열심히 했던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가져갔었다. 그렇게 나는 합정동에 위치한 작은 바이럴 마케팅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근데 나의 착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걸까? 전 회사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자 지원했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은 바로 팀장님 재떨이 치우기. 분명 난, 바이럴 마케팅 회사에 입사를 했고, 콘텐츠를 운영하는 팀을 지원했건만, 아침마다 남이 피던 담배꽁초를 치우게 될 줄이야.

체계적이고 수당도 잘 챙겨주는 큰 회사를 다니다가 두리뭉실한 작은 회사에 다니게 된 나는 생전 처음 맛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절대로 작은 회사를 비하하는 마음은 아니다. 다만 나의 작은 바람이 크나큰 시련으로 다가왔었다.

CJ를 다닐 땐 직원들의 복지로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무조건 6시 칼퇴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는 첫날부터 야근이 밤 10시쯤이었다. 분명 퇴근 시간은 6시인데. 그렇게 매일 같이 나의 일과는 진행되었고, 대기업에서는 신청이라도 하면 주는 야근 수당은 여기서는 당연히 없었고, 그 누구도 이 작은 회사에서는 야근 수당이라는 걸 신청하지도 않았다. 나보다 한달 반 일찍 입사했다고 어쭙잖게 선배 노릇을 하는 동갑내기는 앞으로 화장실 청소도 나보고 하라고 했었다.

나는 글을 쓰러 왔건만 계속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아파서 결근을 하던 날도 득달 같이 전화 오던 상사는 집에서도 재택근무가 가능하냐는 말을 했었다. 목구멍까지 욕이 올라왔지만 10살이나 적었던 나는 다짐했다.

‘내 십년 뒤에는 너처럼 안 산다.‘

그렇게 속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문득 내 활력소를 찾아줄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 귓가로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옛 기억.

“야 송영현 너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분장해보는게 어때? 이 새끼 손재주도 좋은데 지만 모른다니까? 저번에도 봐, 누가 그때 특수분장 독학한 거라고 하겠어. 전문가가 했다고 하지.”

그 길로 바로 나는 집에서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원 큐에 갈 수 있는 신촌 미용학원에 전화했다.

“저 특수분장만 따로 배울 수 있을까요?”

전화 받는 상담원은 자세한 설명은 학원으로 오면 해준다고 무조건 나오기를 권했다. 무언가에 홀려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미용학원에 결제를 했다.

그리고 무슨 자신감으로 회사에 저녁마다 학원에 간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왔다. 회사 사람들은 나를 보고 뒤에서 대놓고 수근거렸고, 그러던지 말던지 나는 퇴근 후 미용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아프다는 핑계로 나는 정확히 2주 뒤 퇴사했다.

활력을 찾고자 했던 나, 정확히 말해 숨통을 틔울 구석을 찾다가 미용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원을 등록할 때부터 나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특수분장보다 영화에서 써먹을 수 있는 분장 중심으로 알려 달라고 했다.

나를 지도해 주시던 선생님은 나를 유심히 보시고는 손재주가 좋다며 갑자기 학원 다닌지 며칠만에 현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메이크업도 해보는게 어때?”라며 권유하셨다.

이 직업을 업으로 할 생각보다 단지 난 영화 촬영할 때 조금 더 도움이 되려고 배운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집에서도 복습이라는 걸 진행했고, 남동생 얼굴에 섀도우를 바르고 립스틱을 발라주며 메이크업 과정을 익혀 나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자격증을 여러 개를 땄고, 정신 차려보니 나는 메이크업 보조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다. 미용을 학부로 전공한 것도 아니었고, 학원에서 배운 게 전부인데, 메이크업 강사를 도전하고 있었다.

나는 기에 눌릴까 내 나이보다 더 나이 들게 옷을 입었고, 분명 BB크림과 파운데이션도 구분 못하던 나였는데, 근데 아무래도 배운 년 수도 그렇고 기초적인 게 부족했던 건 언젠가는 구멍이 생기는 법, 누군가를 알려줄 때 사람은 가장 더 깊게 공부를 하게 된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더 공부를 했고 더 연구했다.

강사는 그 어떤 것이든 학생들 앞에서 당당해야 했다. 주중에는 학원강의를 하며, 주말에는 웨딩 메이크업, 돌잔치 메이크업 행사를 여기저기 다녔다.

특히 웨딩이나 돌잔치 행사에서는 손님들이 그날만큼은 주인공이 되어 있기에 메이크업의 작업방식이 같으면서도 온도의 편차가 있었다. 신부님만 신경 써야 하는 웨딩 메이크업과 달리 돌잔치 메이크업은 우는 아이까지 달래가면서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메이크업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결혼 전 사진이나 연예인 사진을 가져와서 똑같이 해달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손님한테 대놓고 못한다고 깨지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한 메이크업을 보고 맘에 안 들었는지 원장님은 손님메이크업 수정을 내 보는 앞에서 다시 하기도 했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의 이끌림으로 인해 나는 메이크업계에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6개월만 버티자 3년 버티자 5년 버티자 했던 게 벌써 몇 년 차인가 싶다.

“원장님, 다음 주 수요일에 광고 촬영 가능하신가요?”

어느 순간에는 예전에 일을 주셨던 원장님에게 반대로 내가 일을 드리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해준다는 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만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메이크업을 하면서 나는 실력만으로도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고, 친절은 기본이고, 상냥함도 당연히 필요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손님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텨 메이크업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손님 앞에서는 당당했지만 속으로 아직도 내가 메이크업을 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현재 나보다 많은 선생님들이 메이크업을 잘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현장에 나가면 긴장이 되고, 만약을 대비해 하나라도 부족함 없이 제품을 더 챙긴다. 내가 배운 거에 안주하지 않고, 다른 부분들을 보고 배운다.

이 일을 제대로 시작한지가 9년 차. 결코 쉬운 시간들도 아니었다. 메이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얼른 서른이 넘어 년 차가 많아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년 차에 부끄럼이 없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2017년 광고 메이크업 현장


메이크업아티스트 은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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