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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22. 2024

나와 운동의 역사 2


두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둘이 벌어 둘이 쓰다가) 하나가 벌어 넷이 써야 했으므로, 더 이상 나의 운동에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사실 돈보다는, 시간이 없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아니 내가 모르는 이유로, 발바닥이 엄청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족저근막염이라고 했다. 뒷다리 근육이 쫄아들어 발바닥 근육을 잡아당겨 통증이 생기는 것이라 했다. 나의 다리 뒤쪽 근육은 왜 쫄아들었을까? 실상, 성장기가 아닌 이상, 운동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더욱이 쓰는 방향으로만 계속 같은 동작의 노동만을 반복하면, 다른 근육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쪼그라들게 마련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이유 없이 오른쪽 어깨부터 윗팔뚝이 아프다가, 엄지손가락이 저려왔다. 병원에 갔더니 경증의 목디스크라 했다. 책상을 앉을 시간도 없고 컴퓨터 작업도 안 하게 된 마당에, 대체 웬 목디스크? 그 역시 찾아보니 운동부족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운동을 해 왔는데, 두 아이를 끼고 살면서 밤낮으로 같은 근육만 사용하게 된 나에게 내 몸의 다른 부위들이 대체 왜 그러냐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다시 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운동에 쓸 시간도, 돈도, 없었다.


*


등산 동호회를 따라다니던 가닥이 남아서일까? 큰 아이가 유치원에 가게 되자, 당시 서너 살이던 둘째만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산에 갈 엄마들을 모집해 모임을 만들었다. 간식과 돗자리를 싸들고 마을 뒷산에 함께 올라 아이들을 뛰어놀게 하고 엄마들끼리는 친목을 다졌다. 크게 운동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육아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은,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아이들이 둘 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옛 기억을 떠올려 수영 강습을 시작했다. 오래전에 평영까지 배웠던 실력은 십수 년 만에 다시 초급으로 돌아가 있었다. 물에 뜨는 법을 잊지는 않았지만, 오십 분 간 물속에서 팔다리를 계속 휘젓고 나면 완전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수영하는 동안에는 물에 포옥 감싸이는 느낌이 좋았고,  내가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만 들려서 세계가 고요했다. 그리하여 열심히 강습에 참여한 덕분에 몇 달 만에 '오리발'까지 신을 수 있는 중급반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계속 강습을 받아서 멋진 버터플라이(접영)까지 해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중급반에 가보니 수영장에도 '공동체'가 존재했다. 스승의 날이 되자 수영 '스승님'의 선물비를 각출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함께 점심을 먹자든가 뭔가를 공동 구매하자든가 하는 제안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난무하기 시작했다. 다른 관심사가 없었다면, 그 공동체에 투신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이미 다른 '아주 빡센' 공동체에 투신 중이었기 때문에 수영장 공동체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뻔히 보이는 공동체를 모른 척 '쌩깔' 수 없었던 나약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수영 강습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그때 내가 투신했던 공동체는 책 읽고 글 쓰는 인문학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고도 시간을 더 내서 화장품이나 비누 같은 것을 만들어 팔았다. 그런 재주가 없으면 커피도 내려 팔고, 바느질로 뭔가를 만들어 팔고, 아무튼 계속 그렇게 뭔가 팔 수 있는 걸 만들어서 공동체의 운영과 유지에 힘을 써야만 했다. 그래서 나처럼 적극적으로 공동체 운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운동에 쓸 시간이 당연히 부족했다. 그러나 모두들 또 나처럼 중년을 넘어가는 중인 나이들인지라, 계속 그런 생활을 지켜내려면 운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다행히 그때 공동체에 오시는 분 중에, 운동 전공자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을 스승으로 추대하여, '활(기)총(기)생(기)'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운동 모임을 만들었다. 스승님은 노동에 시달리는 연로한 우리들을 위해 몇 가지 유산소 운동과 가벼운 근력 운동을 혼합해서 약 50분간의 운동 코스를 만들어주셨다. 우리는 그 코스를 잘 기억해 두고 스승님이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코스를 반복해서 운동했다. 그러나 젊고 바빴던 스승님은 어느 날부턴가 공동체에 자주 오지 않게 되었고, 같은 것을 반복하는 데 싫증이 나게 되자 '활총생' 모임은 자연스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나는, 당시 유행 중인 필라테스 강습에 다녀보았다. 어찌 보면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기구들을 이용해 몸을 움직여주는 필라테스는, 평소 전혀 쓰지 않아서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들을 쓰게 만들어줘 한동안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복습을 하고 싶어도, 기구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싼 맛에, 아파트 단지 안의 헬스장에도 나가보았다. 기구들은 소박했지만 나름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었다. 문제는 남보다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내 귀가 견디기 어려운, 터줏대감 어르신의 잔소리와 헬스장 옆에 딸려있는 골프 연습장의 타격 소리였다.


*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다가, '내게 과연 운동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20여 년 간 나의 스노보드는 숲 속의 공주처럼 잠만 자고 있었지만, 잠자는 공주의 성을 감싸 자라던 가시 덩굴풀처럼, 그 동안에도 나는 잠들지 않고 부단히 운동을 해왔던 것이다.


젊었던 날에는, 운동은 내게 그저 하나의 새로운 놀이였던 것 같다. 어릴 때 자라면서 운동을 삶의 일부로써 자연스럽게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이런저런 운동을 삶의 새로운 재미의 요소로 접근했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운동은 내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자, 또 다른 사회생활 즉 사교모임의 도구였던 것 같다. 물론 놀이였거나 건강을 위한 것이거나 혹은 사교의 수단이거나, 운동은 나 자신의 '몸'에 자체에 대한 관심을 수반했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나 부차적이었다.


지금 나는 몇 달째, 요가 수련을 하고 있다. 요가도 물론 놀이로도, 건강을 위해서나 혹은 사교의 수단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런 것들보다 내 '몸'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 내 몸이 수단이었던 지난 많은 시간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내 몸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무엇으로까지 변신할 수 있을까가, 지금은 매우 궁금하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당분간은 시간뿐만 아니라 돈도 좀 써야 할 것이다. 아직은 혼자서 내 신체의 한계를 극복해 낼 만큼의 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나를 매우 매섭게 그러나 천천히 가도록 훈련시키는 우리 요가샘은 참으로 내겐 적절하다.


요가를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미래의 내 모습을 슬쩍 그려본다. 그러면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가 떠오른다. 어떤 책에서 그는 아침에는 검도 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글을 쓰며 지낸다 했다. 그런 그의 검도장 주변에는 그에게, 검도이든 아니면 사상적 측면에서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멀리서 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살아간다고도 했다. 그만큼 위대하고 훌륭하게는 아닐지라도, 몸과 정신을 단련하면서 맑게 더불어 함께 나이 들어갈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참 좋겠다. 그러기 위해 우선 나부터, 운동으로 계속 맑아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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