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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n 16. 2024

용감한 맨발

오랜만에 서울에 약속이 있었다. 지하철을 오래 타고 가야 하는데 뭘 하면서 갈까 생각하다, 오늘 아침 정말 백만 년 만에 펼쳐본 프랑스어 책의 한 페이지를 인쇄했다. 열차 안은 한가했고, 곧 자리가 났다. 나는 프랑스어 책 페이지가 인쇄된 종이를 펼쳐 들고, 스마트 폰의 사전을 찾아가면서 아주 천천히 단어와 문장을 음미하면서, 작가가 표현한 원문의 느낌을 상상해 보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프랑스어가 인쇄된 종이 너머로 발 하나가 보였다. 어, 근데 뭔가 어색했다. 무심하던 눈길에 힘을 줘, 다시 자세히 바라보니 신발이 없는, 얌전히 스타킹을 신고 있는 작고 고운 여성의 발이 보였다. 그 발 옆에 반짝이는 구두 한 켤레가 아주 얌전히 나란히 놓여있었다. 새 구두를 신은 발이 정말 많이 아팠나 보다. 그 발과 구두의 주인 얼굴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꾹 참고, 다시 내 프랑스어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스마트폰에서 찾은 프랑스어 단어를 적는 척하면서 자연스레 고개와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분산시켜 가면서 결국 발과 구두의 주인을 흘긋 바라보았다. 아주 단정하고 격식도 있어 보이는 검정 원피스 차림의, 긴 머리의 젊은 여성이다. 체구도 나만큼이나 호리호리한데 저리 용감하게도, 맨발로 아니 스타킹 발로 지하철 한 복판에 서 있다니! 나는 그녀가 정말 존경스러워져서, 사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


오늘 아침 백만 년 만에 프랑스어를 들여다보게 된 건, 지금 참여 중인 백일 동안 글쓰기 때문이었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게, 처음엔 좀 만만해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안에 쓸 말이 남아나질 않았다. 며칠 전부터 또다시 이젠 대체 뭘 더 써야 하나 고민하다, 퍼뜩 생각난 책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그 책을 읽을 때 첫 페이지부터 충격적이었던 건, 외부적으로 별 특별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저 자다가 눈을 뜬 그 짧은 순간에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들만으로도 수십 페이지의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뭘 써야 하나 하는 고민 같은 건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드디어 오늘 아침 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오래전에 읽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먼지 낀 그 책을 꺼내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곤 맨 처음 한 단락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아, 이 세상의 누군가는 잠잘 때 '내가 잠이 드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는구나! 나는 어떤가? 잠들기 전 나는 대체로, '자고 싶다'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친다. 늦은 밤까지 졸면서, 귀가가 늦는 아이들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잘 써지지 않는 글을 비몽사몽으로 쓰다가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아침잠 없는 남편이 먼저 일어나 집 안 이곳저곳에서 달그락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날 때도, 역시 나는 책 속의 주인공과는 달리 그저 비몽사몽 '아, 좀 더 잘까 아니면 일어날까'하는 갈등이 대부분이다.


*


이런 나로서는 프루스트 흉내를 내는 건 가능하지 않도다! 처음의 한 단락을 읽으면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데, 문득 소설의 원문이 프랑스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초급이긴 해도 그래도 몇 년이나 프랑스어를 붙들고 있었던 나는, 원문의 표현들이 궁금해졌다. 어차피 프루스트 흉내가 안 될바엔, 원문이나 찾아 읽어보자 싶었는데 다행히 구글에서 원문 PDF 파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설의 첫 단락 두 페이지를 원문으로 인쇄해 지하철 타는 동안 천천히 읽어보려 했던 것이고, 그러다가 프랑스어가 인쇄된 종이 너머로, 용감한 젊은 여성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고, 나는 이제 프랑스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이름 모를 여인의 용감한 맨발을 떠올릴 것이다. 그 맨발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 내 마음속에서는 프루스트의 그 소설 전체를 원문으로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다는 매우 용감한(?) 소망 하나가 싹텄다. 그렇다면 물을 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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