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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로콜리 Jul 31. 2022

성인이 되는 방법?

#12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고 말씀하셨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나도 모르게 부모님께 짜증을 낸다. 막상 짜증을 내고 나면 후회가 된다.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하지만, 몸이 아픈 날은 또다시 반복이다. 이게 참 쉽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스스로 자신을 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움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헛된 노력과 낙담을 피할 수 있다.

거창하게 성인이 되는 나를 상상해보자. 사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인으로 만들어 주시는 방법을 발견하면 된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은총에 최대한 열려 있으려 노력하면 된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인들과 수도자들의 삶에도 관심 갖게 되었다. 가난을 자처하며 겨울에도 난방을 떼지 않고, 반찬 하나 없이 맨밥만 먹고, 수시로 단식하고 기도를 아주 많이 하는 삶.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고행하는 수도자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또, 성녀 소화 데레사 전기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를 보면서 위대한 성인들이 한 신심 행위에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푹 빠져서 기도했다는 그들과 달리 나는 묵주기도 한 번을 제대로 집중해서 해본 적 없다. 그들에 비해 나는 정말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이며, 예수님께서 나를 별로 예뻐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급기야 내가 너무 부족해서 지금의 이 고통이 주님께 벌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내 단점, 실수, 잘못, 죄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지나친 집착과 노력.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죄라는 작은 목표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하려는 게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죄를 아예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성인들도 불가능할 것이다. 죄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 희망을 주어야 하고, 위로가 되어야 한다. 삶의 불안을 감소시켜야지, 가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죄에 집착한 나머지 종교에서 두려움, 고통, 혼란, 무의미한 죄의식 같은 것들을 느꼈다.

죄의식은 묵주기도를 할 때 자주 나타났다. 묵주기도를 하면 분심이 잘 생겼다. 아마도 똑같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는 탓에 그럴 것이다. 묵주기도만 하면 ‘너는 기도할 때 집중을 못 해!’라며 나를 공격했다. 미사 드릴 때나 기도할 때 분심이 들면, 다른 신자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이렇게 부족한 거라고 자책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기도하는 것이 괴롭고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한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우울했는데 사도 바오로의 복음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로마 12,6-8)


그렇다. 난 부족한 사람이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각 사람은 하느님 눈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세상 만물이 각자 역할에 맞게 창조되었듯이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하느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과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때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스스로 만든 이미지에 ‘집착’하는 데 있다.

정작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정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우리가 가진 성격적 결함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그 결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 바라실지도 모른다. 이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성인이 되길 원하시지만, 완벽주의자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것을 행할 때 은총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위한 은총은 보장되어 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과 우리의 생각이 달라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결국은 훨씬 더 풍요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 특별히 바라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꽃이다. 각기 다른 꽃이다. 나는 장미인데 백합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장미는 백합이 될 수 없을뿐더러 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장미는 쓸모없으니까 백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꽃이 있다. 하느님 앞에서 필요 없는 존재란 없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보다 내가 무슨 꽃인지 찾는 것,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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