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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Apr 22. 2023

시간을 선물하는 시계

시어머니 예물 시계를 물려받았다.

액세서리를 평소 즐겨하지 않는다.

시계는 핸드폰 로밍 값이 금값이던 시절 해외에 나갈  어쩔 수 없이 차 본 게 전부이다.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은 손목을 위해, 언제 채워질지도 모를 시계를 위해 고치는 값이 괜히 아까워 서랍 속에 고이 모셔뒀다.


이러다간 서랍 속에서 시간만 보낼 것 같아 보였는지 신랑이 시계를 시계방에 맡기고 왔다. 손목 치수를 줄자로 재서 사장님께 알려드리면 시계 줄을 줄여주신다 했다.

아무래도 불안하셨는지 시계방 사장님은 직접 치수를 한번 재러 나오라 신다.


참으로 진심 귀찮다.

어머님이 주시는 의미 있는 시계는 소중하지만 그것 때문에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 건 상당히 귀찮다. 이러나저러나 시계는 찾아와야겠지. 일요일 셋째의 낮잠 시간에 시계방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일요일이.

어제도 집, 오늘도 집.

계속 집콕인 우리는 딱히 누군가 나서서 나가자는 말이 없다. 어제보다는 날이 좀 좋다. 시계방 갈 시간이 다가오자 서둘러 세수만 하고 외출용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낮잠 안 자는 1호, 2호가 눈에 밟힌다.


"너희도 엄마 따라갈래?"


해서는 안될  금기어를 내뱉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옷을 갈아입는다. 학교 갈 때는 옷을 입으라 입으라 해도 귓등으로 듣더니, 이럴 때는 우사인볼트 저리 가라 할 만큼 전속력 전진이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봄나들이를 계획할 걸 그랬나. 귀찮은 엄마 만나서 나들이 한 번을 제대로 못했단 마음에 미안함이 앞선다.


현관문 앞에서 신랑이 묻는다.


"애들 데리고 가려고?"


자기는 나 혼자 가는 김에 시내에 콧바람 쐬고 오라고 하는 거였단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하는 거지. 미리 그렇게 얘기했음 맘 편히 시내 가서  맛있는 거 먹고 구경하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럴 건데. 왜 지금 그러는 거지. 다시 애들한테 너네 집에 있으라 다시 얘기할 수는 없잖아. '


눈치 게임에서 졌다.

괜히 아들 셋 독박 육아가 마음에 걸려서 두 아이들에게 같이 가자했다. 주말 나 홀로 나들이를 놓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좌 장남, 우 차남을 든든하게 대동하고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집을 나서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낮잠을 자던 둘째는 잠투정이 시작됐다. 어린이용 1회용 지하철 승차권을 첫째에게 끊어줬더니, 자기 건 왜 없냐고 뿔이 났다. 지하철을 타자 언제 도착하느냐며 묻기 시작했다. 6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은 또 왜 이리 먼 걸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묻는다.


"엄마, 언제 도착해?"


어른의 걸음걸이에도 신당역 6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곳은 꽤 멀었다. 드디어 2호선을 타고 을지로 4가에서 내렸다. 동생은 개찰구를 혼자 나서는 것도 어색한 초등학생이 또 부럽다. 교통카드를 쥐어주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카드가 찍힐 때 나는 삑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아직은 순수한 유치원생이 웃는다.


이제 또 걸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4번 출구. 처음 와보는 을지로 4가 역 4번 출구를 찾아 계속 걸었다.

앗. 어. 뭐지. 뭔가 좀 이상하다.

3호선 표시가 자꾸 보인다.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반대로 걸었다. 어김없이 발휘되는 길치의 길 찾기 실력. 엄마의 실수를 당당히 고백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계속 묻는다. 마흔일곱 번째쯤 되는 물음.


"엄마, 언제 도착해?"


길치의 실수로 늘어난 걸음수가 미안해서 화도 못 냈다. 그들은 이제 배도 고프다. 참새 방앗간 편의점이 보인다. 시계방 사장님과의 약속 시간도 다가온다. 편의점을 본 이상 놓치지 않고 과자와 주스를 하나씩 손에 들었다. 아직도 지하철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계산만 하고 저 앞에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만 타면 바깥세상을 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역을 벗어나 시계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걸어가야 하는 시계방 4번 출구 400미터 앞이라 했는데, 아직도 도착을 못했다. 아이 둘과 함께 가는 400미터는 꽤 멀었다.








드디어 시계방에 도착해  아이들은 주스를 마시며 잠시나마 기다려줬다. 언제 도착하냐며 백번 물어본 아이들에게 이 기다림은 엄청 오랜 기다림이겠지.

고된 기다림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청계천 산책을 제안해 본다.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으며 곧장 청계천으로 내려갔다.


버려진 나뭇가지로 물고기도 없는 천에서  낚시를 했다. 풀잎 주워 냇물에 던져 배 띄우기도 해 본다. 졸졸 내려가는 물도 폭포라며 손뼉 치며 환호성이다. 징검다리가 등장할 때마다 몇 번이나 징검다리를 오갔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활짝 피었다.



청계천 낚시꾼


좋은 걸 이렇게 오랜만에 하다니.

어머님의 시계 덕분에 값진 시간을 선물 받았다. 오래된 시계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려고 그렇게 서랍 속에서 말을 걸어왔나 보다. 시계 수리가 끝날즈음에도 봄은 이어지겠지. 그땐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 선물 같은 시간을 만날 그날의 봄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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