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오늘도 비가 왔었다. 결혼식 때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결혼을 했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오늘 뭘 할 거냐 계획을 내놓으라 신랑에게 물었다.
바로 식당 예약을 했다고 한다. 어딘지 알려주지 않는다. 동네라고만 한다.
이런 이상한 서프라이즈라니. 그냥 아예 알려주지를 말지. 더 궁금하다. 궁금하다. 궁금하다. 그래도 기념일 서프라이즈라고 하니 잠시 참아본다. 기대를 하면 실망이 클 수도 있으니 살짝 다시 물어본다. 종목만 알려달라며 약간의 힌트를 구한다. 이렇게까지 이럴 일인가.
아니 아니 아니 아니 그냥 안 가르쳐줘도 된다 손사래를 쳤다. 참아봐야겠다.
한 시간 뒤, 안 되겠다며 또 물어본다. 신랑이 어이없어한다. 그냥 뭐 그날 가면 놀라는 척 우와 이게 뭐야 하겠다고 했다.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기념일이 별 건가.
예전에 친구들 모임에서 갔는데 분위기도 좋고 고기도 맛있었다며 같이 가려고 일부러 자세히 이야기도 안 했다고 한다. 그런 적이 있었냐며 대충 응수해 주고 빨리 답을 알려달라 했다. 궁금하니깐.
이름은 "OOOO"(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했어요. 개인적인 문의는 언제나 환영합니다.) 소고기를 파는 곳이라고 한다. 일단 고기라서 합격. 이 동네에 분위기 좋은 곳이 있었나 싶어 대충 이름만 듣고 시간은 흘렀다.
오늘 드디어 예약한 곳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어김없이 롤러코스터 같은 마을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여긴 내가 지나가본 곳인데, 여기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있었던가. 아닌 것 같다. 어라. 저번에 가본 코다리찜 쌈밥 집이 보인다. 혹시 여기 쌈밥을 고깃집이라고 하는 것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입구가 포장마차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자로 보이는 듯한 손님 두 명이 있고, 텅텅 비어있다. 암만 평일이라지만 12시 점심시간에 우리만 있는 건가. 테이블도 몇 개 없다. 8개 정도. 맛있었다는 말을 일단 의심해 본다. 진짜 맛있었던 건가.
그냥 불판에 고기를 구워 먹는 줄 알았는데, 코스 요리라고 한다. 하. 코스 싫어하는데.
코스 요리를 싫어하는 건 단순하다. 한상 가득 차려 놓은 요리를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며 배불리 먹는 걸 선호한다. 코스 요리는 일단 조금씩 조금씩 먹어야 하고, 감질맛이 나 죽겠고, 먹다 보면 뒤에 요리가 나오는 걸 배 불러서 무슨 맛인지 모를 때가 있고, 다 먹고 나면 뭔가 허전하다. 아. 코스 요리.
오늘은 기념일이라 코스 요리인 건가. 그래 이런 날 먹어야지 마음을 다스리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가볍게 신랑은 맥주를 시켰고, 술잔을 짠 기울였다. 축하한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이런 식상한 인사로 서로를 다독였다.
"주전부리를 드리겠습니다."
예쁜 꼿 모양 그릇에 김부각과 육 표 두 조각을 주셨다. 육포 두 조각. 육포가 맛있다. 평소 즐겨 먹지 않는 김부각도 고소하다. 맥주는 신랑이 먹는데 주전부리는 내가 먹었다. 이제 시작인 건가. 신랑이 육포 한 조각을 양보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다.
다음은 방울토마토 두 알이 나왔다. 두 알. 여긴 2를 좋아하나 보다. 바질 오일이라는 걸 화장품 병 같은 곳에 담아서 스포이드로 뿌려주셨다. 우와! 이 오일 마음에 든다. 토마토는 새콤달콤 상큼했고, 바질 향은 풍미를 더해줬다. 2알은 좀 탐탁지 않았지만, 전채요리로 배를 채울 수는 없으니 일단 괜찮다.
바질 오일이 곁들여진 방울 토마토 2알
다음은 콩국수. 구운 관자와 밤이 올려져 있다. 콩국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 중 하나이다. 있으면 먹지만 여름이 되어도 혼자서는 절대 찾지 않는 메뉴이다. 콩물의 살짝 비린 맛이 영 입맛에 맞지 않는다.
어라. 이건 비리지가 않다. 한 젓가락 밖에 되지 않는 국수를 두 번에 나눠 먹었다. 국수가 얼마나 쫄깃쫄깃하던지. 점점 빠져든다.
한 입에 먹으려다 나눠먹은 콩국수
조개탕을 테이블 위 작은 인덕션에 올려주셨다. 고기에 조개탕이라니. 조개탕이 끓어오를 동안 호박전을 주셨다. 이것도 하나씩 먹으라고 2개. 늙은 호박전을 먹으니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가 이걸 참 맛있게 해 주셨는데. 휴가 때 친정에 가면 호박은 내가 숟가락으로 팍팍 긁을 테니 한번 해달라 졸라봐야겠다. 손자들 먹을 것만 걱정하시겠지만.
샐러드와 파절임, 장아찌 그리고 소스와 물김치가 나온다. 드디어 고기가 나오는 건가.
오오오오오오오. 마블링. 흰색과 선홍색의 적절한 조화가 마음에 든다. 여러 가지 야채가 함께 나오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흰색 가운을 입은 요리사가 직접 나와 고기를 구워주셨다. 40 일 숙성한 등심이라고 한다.
고기와 야채
취이이이익 경쾌한 고기 굽는 소리. 행복하다. 한 면을 촥 굽고 한 면을 촥 굽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4면을 착착 착착 구워 잘라주셨다. 그리고 다시 작은 조각을 칙칙칙.
접시에 가지런치 놓아 상에 올려주신다.
이건 무슨 부위고 저건 무슨 부위라 알려주신다. 등심, 안심 이렇게만 나누는 줄 알았는데, 처음 들어보는 고기 부위가 생소하다. 처음엔 소금만 찍어 먹어보라 신다. 첫 고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입 먹어본다.
우와. 살살 녹는다. 숙성고기는 처음 먹어보는데 이런 경험 처음이다. 소중한 첫 경험, 맛있다는 말 밖엔.
고추냉이도 찍고, 파가 송송 들어간 간장 양념도 찍고, 파절임에도 한입, 장아찌에도 한입. 신랑이 고기 추가를 물어본다. 맘 같아선 3인분을 외치고 싶었으나, 이것은 코스 요리 뒤에 식사가 또 남아있다. 오늘은 기념일이니 우아하게 1인분만 추가 주문을 해본다. 추가 주문 한 고기가 나올 때 식사도 함께 달라며 잊지 않고 얘기한다.
밥과 된장찌개가 나왔다. 집된장으로 만든 찌개를 비벼드셔 보라는 한마디. 밥 따로 국 따로 먹는 나에게도 비빈 된장은 감칠맛이 제대로 감도는 구수함이었다. 연신 맛있다며 박수를 치며 쌀 한 톨, 고기 한 점도 남김없이 비웠다.
디저트로 참외 셔벗과 쑥꽃차가 나왔다. 냉탕과 온탕의 느낌을 오가며 기름진 입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셔벗은 상큼했고, 쑥꽃차에선 향기로우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찜질방 쑥탕의 향기. 약간의 유머도 즐기며 즐거운 식사는 마무리 됐다.
요리에서 정성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공들인 메뉴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졌달까. 이런 공들인 음식을 만드시는 분이 동네에 계셨다니. 꼭 한번 다시 와보고 싶어졌다. 훈훈한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서는데,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표시가 있다.
미슐랭을 세번씩이나
MICHLIM 2021, 2022, 2023. 어쩐지. 남다르다 했다. 코로나로 육아로 집에만 있었더니 동네에 미슐랭 레스토랑이 있는지도 몰랐구나. 이제라도 와본 게 어디냐며 애써 위안해 본다.
가자. 집으로.
기념일, 고기도 먹었으니 힘내서 육아를 해야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구호를 외쳐본다.
천년만년 행복하게 잘 살자!
이 구호는 결혼식날 스냅사진작가님이 알려주셨다. 어색하게 이 말을 외치는 사이 사진을 찰칵 찍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