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저명한 심리학자의 연수를 듣게 되었다. 감정의 속성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몰입해서 듣고 있는데 PPT가 넘어가는 순간 귀신같은 모습의 사람이 화면에 나왔다. 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심리학자는 감정이 즉각적이고 본능적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옳고 그른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만든 자료화면이었다. 나는 그 뒤로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심장이 여전히 뛰고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 심리학자의 강의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이전과 다른 대상과 장소였지만 같은 대목에서 또 그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화면을 보기 전에 눈을 감았다. 참가자들이 놀라는 소리와 함께 화면을 보여준 이유를 그때와 같이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또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제는 뛰는 심장과 함께 화가 났다.
이 두 번의 경험으로 나는 나의 트라우마 상담기록을 쓰게 되었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오래도록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해서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아픔을 이야기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주양육자였던 할머니가 미국으로 하루아침에 이민을 가셨다. 여행이라고 했지만 여행이라고 하기에 많은 준비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가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혼자 남은 나를 준비했다. 나에게 준비란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매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떠나고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무의식 저편으로 깊게 깊게 묻어두었다.
하지만 안심된 것에서 끝나지 않았고 감정은 정직했다. 할머니가 떠나고 꿈에서 귀신이 매일 등장했다. 나는 형체만 나타나도 무서워서 도망을 갔다. 꿈인 걸 알고 있는데도 깨어나면 몸에 힘이 빠지고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꿈에서는 나의 두려움과 절망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두려움의 형제는 대체로 귀신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와 흡사한 모습을 심리학자의 강의에서 본 것이다. 그는 트라우마 전문가였다. 트라우마의 원인과 증상, 치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트라우마가 미친 영향을 가슴깊이 알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짐작한 것만으로도 증상의 심각성을 말하고 내담자들을 경험하면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이 지뢰밭을 걷는 일상이라는 것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불현듯 깊고 두려운 절망을 맛보게 하는 것인지 알았다면 귀신화면을 자료화면으로 사용하는 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는 모를 것이다.
발달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은 사진 한 장으로도 촉발되기 충분했다.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사회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2023년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서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사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20대 남성이 40대 남자 교사를 흉기로 습격하고 도주했다. 교무실과 복도에서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후 교사는 응급수술을 받고 회복하였다.
사건 발생 후 교육청에서는 학생과 교직원의 심리치료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사건트라우마에 해당하는데 교육청의 심리치유 프로그램 중에는 아로마세라피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외상 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 교사에게 적합하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최근 2주의 병가를 내고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다른 학년의 부담임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 반에는 공격성이 있는 유명한 A가 있었다. 나는 더 학교와 주변 선생님들께 누가 될 수 없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내 몸과 마음은 여전히 바닥에 붙어 있지만 약의 복용을 늘려서 각성을 높이고 있었다. 우리의 현실은 그런 것이었다. B를 피해 A를 만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이가 3월 한 달간 학교를 다니고 새롭게 사용한 단어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라는 말을 8살짜리도 사용할 정도로 일상적인 용어가 되지만 트라우마의 상처를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칼부림 사건을 경험한 동료교사들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중에도 문뜩 그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고 사건이 일어난 날의 풍경과 소리와 분위기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주양육자였던 할머니의 이민이 나에게 트라우마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할머니가 떠나고 1년간 귀신이 쫓아오는 꿈을 매일 꾸었음에도 나는 몰랐다. 주변 어른들에게 '매일 꿈에서 귀신이 쫓아와서 건물 꼭대기까지 도망가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라고 말을 했을 때 '다 키가 크려고 그런다'라고 말했다. 우연인지 정말 그 기간에 키가 많이 자랐다. 그 일은 그렇게 키크는 꿈으로 여겨졌지만, 나는 매일 밤이 두려웠다. 발을 이불밖으로 빼지 못하고 웅크린채 잠이 들었고 깨어났다. 치유되지 못한 채 무의식 저편에 깊이 박혀 버렸다.
미국은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건장했던 청년들이 돌아야 폭력, 자살, 알코올중독 등의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것을 보며 PTSD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후 개인의 취약성이 아니라 사건, 재난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게 되면서 국립트라우마 치료센터를 1988년 설립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세월호를 경험하면서 국가트라우마센터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개인의 문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트라우마를 경험한 개인은 자책을 한다.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기록된다. 의식을 관장하는 해마에서 무의식을 기억하는 편도체에 기억을 담아놓는다. 트라우마 치료에서 무의식, 몸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이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적용한 상담과 달리 감각운동심리치료(SP)를 바탕으로 한 상담은 나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것, 나조차 잊고 있던 삶의 조각들을 찾아가다 보면 나도 발이 땅에 닿는 기분이 들까? 나도 다리를 편히 뻗고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런 편안함, 안정감이 느껴지는 삶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