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1년은 2월부터 찐 시작이다. 1년의 업무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연륜 있는 어떤 샘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2월만 미친것처럼 굴면 1년이 편하다고 하지만 우리 중에 감히 머리에 꽃단 미친자이 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춘기 시절에도 미치지 않고 조신하게 생활했던 범생이들이 대체로 모인 곳이 교사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재주는 타고나는 것이다.
의례히 새로 부임하는 샘들은 담임이 되는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된 것이었지만 경력 30년 차의 새로 전근오는 남자선생님은 포스가 남달랐다. 지금껏 자신이 담임업무와 학교일을 해왔는데 이 경력, 이 나이에도 자신이 담임을 해야 하느냐고 거품을 물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우리는 감탄했다. 교무부장을 만나서 한탄과 압력을 넣어서 담임에서 빠지고 생명체를 대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부장이 된 일은 큰 수확이었을 것이다. 멋지다 싶으면서도 좀 얄밉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 그 정도 강단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10년이 지나 그 나이쯤 되니 나도 얼굴은 두꺼워졌으나 아직 심장은 벌렁 벌렁거린다..
나도 여때껏 3인분 일은 해왔다고 이제 기운이 딸려서 좀 쉬운 일을 맡으면 안 되겠냐고 이력에 기대에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일을 넘기는 꼴이 된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마른침만 꿀꺽 삼킬 뿐 애초에 단념했다.
일 년을 다 살아버린 12월이 되니 그때 차라리 미친자가 되는 꼴이 여러모로 민폐를 덜 끼쳤겠다 싶기도 하다. 내가 지례 포기하지 않고 내 멘탈이 바람 한번 불면 날아가 찢어질 휴지 같다는 것을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후회는 후회일 뿐 모든 일은 벌어졌고 후회는 내 몫이 되어 밤잠을 못 이루게 했다.
생각해 보면 굳이 미친년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마지막 육아휴직까지 몽땅 끌어 썼어도 멘탈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는 나도 내 상태를 정확히 몰랐지만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으며'언제 한번 괜찮은 적이 있었냐'는 위로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그렇게 맡게 된 담임이 별 탈 없이 지나갔으면 좋았으련만 경력 20년차 교사의 마침표가 정신과 출입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은 비참함과 좌절감은 아직도 가슴에서 눈물 젖은 불기둥이 쏟아 오른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돌아본 12월의 이야기이고, 2월엔 어떻게든 해보자고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새 학기 업무분장이 발표된 날 급기야 허리가 안 펴져 한의원에 기어가며 허리가 돌처럼 굳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의사는 어깨에 쌓인 긴장이 허리로 내려갔다고 한다. 돌처럼 굳어진 허리와 통증이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차가운 장침을 살갗에 꽃아두고 만감이 교차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치료를 받으며 많은 생각들 했지만 뭐든 나에게 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유를 묻는 질문은 내 탓으로 몰아가는 습관일 뿐이었다. 긴장감에 잠을 못자다 아껴둔 상담을 신청했다. 교직원공제회에서 제공하는 4회 무료상담을 나중에 힘들 면 쓰고 싶었는데.. 나중은 무슨..
상담은 1시간 진행되었고, 아래 내용은 기억을 떠올려 적은 내용이라 재구성된 것이다.
상담사: 어떤 마음을 작업하면 조금 더 생활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어떤 게 요즘 불편한가요?
나: 업무분장이 발표되고 긴장이 내려가지 않아요. 머리로는 못 할 일이 없는 걸 알고 다 할 수 있겠다는 것도 아는 데 숨이 차고 어깨가 뭉치고 계속 긴장이 돼요.
상담사: 눈을 감고 그 느낌이 몸의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느껴보시겠어요?
나: 입술이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요.
*몸을 통한 트라우마치료를 적용한 상담이다.
상담사: 괜찮으면 그 느낌을 조금 더 느껴볼게요. 힘들면 눈을 떠도 되고 멈춰도 괜찮아요. 어떤 모습이 떠오른 게 있나요?
나: 네, 쪼그리고 앉아서 마당에서 나무로 그림을 그리는 여자아이가 있어요.
상담사: 몇 살 정도로 보이나요?
나: 5~6살 정도요.
상담사: 그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거기에 있나요? 무슨 생각을 하며 거기에 있나요?
나: 멍하니 그냥 그리고 있어요. 그냥 있어요. 생명력이 없어 보여요.
상담사: 그 아이는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있는 것 같은가요?
나: 그냥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 자포자기, 어떤 기대도 없어 보여요.(눈물이 났다)
상담사: 그렇군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있었군요. 그 아이를 보니 어떤 마음이 드나요? 지금의 선생님이 다가가 그 아이를 안아 줄 수 있나요?
나: 안쓰러워요. 네. 다가갈 수 있어요.
상담사: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반응하나요? 제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마음으로 연결해 보려고 해요. 제가 가서 그 아이를 안아줘도 될까요?
나: 감정이 없어 보여요. 그 아이가 마음을 열까 봐 제가 걱정하고 있어요. 다가오는 손을 잡을까 봐 제가 걱정이 돼요.
상담사: 마음을 열까 봐 걱정을 하고 있군요. 기대하고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군요.
나: 네. 그러면 정말 너무 힘들거든요. 기대하지 말라고 다가가지 말라고 제 마음이 그 아이에게 말하고 있어요.
상담사: 그렇군요. 그 아이는 지금의 선생님이기도 하네요. 너무 걱정이 되시는군요. 그 아이가 담담하게 있는데 그 아이가 마음을 열까 봐 걱정하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네요. 그 아이가 믿었다가 필요할 때 도와주지 않아서 더 절망할까 봐 걱정하는군요. 그 아이를 정말 잘 지켜주시고 싶으신 거네요.
나: (눈물)
*유미의 세포들에서 나오는 세포들과 같다. 나의 내면의 파트 중에 '보호자'는 힘이 가장 셌고 나를 보호도 해주었지만 외부의 도움에서 고립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상담사: 선생님. 5%만 믿어보면 어떨까요? 5% 정도는 제가 도와줄 수 있다는 걸 믿어지시나요?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믿어보시면 어떨까요?
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네, 5% 정도면 믿을 수 있겠어요.
상담사: 네.. 5%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믿으시네요. 네 좋아요. 지금 몸에서 변화가 있다면 자각해 보시겠어요. 5% 정도 조금만 더 믿어보는 걸 해보기로 했어요. 몸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나: 왼쪽 팔과 머리가 시원해졌어요. 조금 더 가슴은 가벼워졌어요. 입술의 떨림도 조금 나아졌어요.
상담사: 네~ 그 느낌을 일상생황에서 더 느껴보시는 거예요. 시원하고 가벼워진 몸의 느낌을요.
상담을 마치고 온몸의 맥이 풀리고 열감도 느껴졌다. 5%가 머리를 맴돌았다. 5%정도 상대를 믿는 다는 게 이런 가벼움을 준다는 것이 새로웠다. 이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다음 상담까지 몸의 감각을 기억하며 지내보라고 상담사는 말했다. 누군가를 의지하거나 인생 특공대라는 각오는 좀 내려놓아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생각해 보면, 그 아이가 쭈그리고 혼자 앉아 있던 그 시절에도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옆집아줌마는 밥도 못 챙겨 먹고 있을까 봐 단무지를 고춧가루와 양념으로 버무린 반찬을 우리 집에 가져왔다. 그리고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데 미안하다, 내가 살길이 바빠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 단무지무침을 가져다준 아줌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괜찮다고 말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내 마음의 곁을 주지 않았다. 모두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온 다는 듯이. 나에게 말도 없이 허락도 없이 날 두고 집을 나간 엄마, 나에게 허락도 없이 여행이라고 말하며 이민을 간 할머니. 나의 경험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듯이 나의 기대로 인한 실망과 좌절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교사로 2월, 업무분장으로 올해가 결정될 시기에 나의 어깨는 삶의 무게로 짖눌리는 것 같았다. 대체로 짖눌린 채 시작하지만 올해 달렸던 것은 상담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5% 기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올해는 나도 사람들에게 기대어 살아보자는 마음을 내었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