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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롬 Dec 03. 2024

프롤로그. 어느 교사의 한해살이

평범해 보이는 교사에게 일어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대로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중략)

나는 반딧불/중식이




출근 길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울컥했다. 유행하는 노래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던데 어찌 이런 노래가 나왔을까. 너도 나처럼 많이 슬펐겠다는 생각이 들쯤 어김없이 지나가야 하는 육교에서 나는 또 작은 사고라도 나길 바란다. 자동차 사고라도 나야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울증이 나를 집어 삼킨 줄을 몰랐다. 교사 경력 20년 쯤 되면 내 분야에서 별이 될 줄 알았다. 언감생심, 처음부터 빛나는 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쯤 되면 나도 나만의 빛을 밝휘하며 행복한 별이 되어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집안내력이 새가슴이고 평탄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 불안이 기본값으로 장착된 나같은 사람이 꼭 아니더라도 교사라는 업이 말린 독버섯 가루를 밥에 조금씩 넣어 서서히 말라죽이는 힘(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ㅜㅜ)이 있는 줄 몰랐다. 비약이지만 감정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짧은 것 또 사실이다. 여럿이 모이면 긴장과 부담, 억울한 사연들로 배틀이 시작된다. 잠을 설치는 것은 기본이고 스트레스에 다클셔클이 팬더로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내 체념하고 더 나은 방법을 골똘히 토론해 보지만 언제나 답이 없다는 것에 한숨을 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나마 친한 동료들과 두서없는 얘기들을 하는 시간은 바다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마음을 수면 위로 끌고와 세상속에서 아가미로 제대로 숨을 쉬는 기분을 들게 했다.


작고 큰 상담을 가장한 민원, 선을 넘는 요구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적어도 서이초 사건 이후 대놓고 하는 민원과 교권침해는 적어졌다고 해도 교사의 마음이 예전의 그 정스러움으로 가진 못했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충격'으로 명명한 스티븐 마이어와 마티 셀리그먼의 공동연구에서 처럼 전기충격을 받은 개는 우리의 문을 열어놓아도 도망가지 못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내상을 입어서 누구도 말하지 않으면 그 상처의 깊이를 모른다. 


교사의 마지막 인간애가 바닥을 드러냈을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자책. 그로부터 옥이 시작된다. 진짜 문제는 폭탄같이 떨어지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이 아니라 나에게 대항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저경력 교사도 잘 포장해서 안전하게 폭탄이 더 이상 폭탄으로서 위력을 상실하게도 만들어 버리던데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적당히 하라는 말의 '적당히'느 정도 인지 계산도 안되고 달려가는 마음을 붙잡을 심지도 굳건하지 못하다. 27살도 아니고 37살도 아니고 47살에도 여전히 헤멜 줄 몰랐다.


교사가 전문직이냐는 말에 아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경력이 많아지면서 갖게 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좌절감이어서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나의 사고는 유연하지 못했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딱 부러지기 쉬운 재질을 갖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더 어려운 인간관계는 조심스러움이 더 커지고 갈수록 다양해지는 아이들의 눈빛에 나는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고 있었다.


결국 나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올 한 해의 문제가 아닐거라는 말은 내가 아닌 교감샘의 입에서 나왔다. '수고했어요. 올해 만의 문제는 아닐거예요. 지금껏 쌓인게...'라는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분명 지금 우리반에서 생긴 문제 같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연륜은 그런것인가 보다. 하지만 나도 그도 몰랐던 것은 나에게 정신과적 소견을 받을 수 있는 증상들이 휠씬 더 오래 됐었다는 거다. 불안, 우울.. 이런 드라마의 단골 스토리 말이다. 나는 여느 사람들이 정신과에 처음가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좌절감을 느끼며 한편 홀가분하기도 했다. 나의 복잡미묘하고 어려운 세계를 딱 한마디로도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불안장애'


넘어진 아이가 울지 않다가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 눈물이 터지듯, 나도 의사선생님 앞에서 깨진 무릎을 보듯 울음이 터졌다.


망해버린 1년 안에서도 진심이 있었다. 너무 고루한 말이어서 참 싸구려 같다. 실패한 1년으로 치부하기엔 어느 해 보다 진심이었던 내 마음이 허공에 뜬 비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게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나마저 토닥거리지 않으면 이 냉랭해진 가슴이 그대로 굳어버릴 것 같다. 초임 때 바라보던 선배교사의 눈빛처럼 나를 방어하기 전에 나는 냉냉이 아니라 더 생생하게 살아가고 싶다.


차분하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선배교사의 지혜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체념과 한계가 묻어 있었다. 과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게 일말의 공교육이 가진 미덕이라면 나의 마음도 그 미덕의 테두리에 좀 끼어 넣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아이들이 예쁘기 때문이다.


실패로 정리하는 건 너무 쉬운 것이라 굳이 나까지 그렇게 매몰차게 평가하며 내 남은 진심까지 바닥에 쳐 박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올해 나의 한해살이는 그렇게 새롭고도 참혹하고도 졸라 쪽팔리게 마무리가 될 것 같지만 괜찮은 척은 하지 않는다. 47살, 그게 나의 유일한 장점과도 같다. 27살에는 꿈도 못 꿨고, 37살에도 감추기 바빴던 찌질한 나를 인정하는 거다. 47살 다른 능력은 후퇴해도 나아지는 게 있어 다행이다. 여기서 아닌 척까지 했다면 뼛가루를 빻아 벌써 언덕 위 나무에 뿌렸을지 모를 일이다. 


굳이 진지하게 묻지 않았는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아니, 오늘은 우울해', 밥은 먹었어요?라는 말에 '약을 먹었더니 이미 배불러'... 라고 말한다. 정상괘도에서 한참 벗어나 보이는 나도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나에게, 우리에게 공유하고 싶다. 처음부터 세상 이치 다 아는 그런 선생님은 애초에 아니었다.


사적이고 아주 사적인 경험들이다. 이 경험을 보편적인 교사에 들이댈까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평범함을 들이대는 교실에도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보통이라는 말, 평범하다는 말이 쉬운 것이 아니었듯 다양한 인간군상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교실의 편안과 안전함은 시작점이 아니라 목표점이었고 나에게도 개인의 편안과 안녕은 기본값이 아니었다. 


행복과 불행이 한 세트이고 기쁨과 슬픔도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올해가 가기 전에 나의 얼룩진 마음을 밖으로 꺼내 햇볕에 빠짝 말려보고 싶다.


평범해보이는 내 삶에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많이도 벌어졌다. 결국 나는 부러졌다. 27살이 아닌 47살에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는 진리이다. 하지만 시간의 힘으로 저절로 좋아지기까지 나는 말라 죽을 수 있다. 치유적 글쓰기라는 말을 듣고 '단어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외향형에서 내향형으로 변한 내가 하기 좋은 방법 같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는 날은 차라리 일어나 글을 써보기로 했다. 시간에 무방비로 맡기기에는 나는 이미 47이고, 지금 오늘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 글들이 부러진 뼈를 다시 튼튼하게 붙게 만드는 천연접착제쯤 되면 좋겠다. 그리고, 나와 같이 얼룩진 한해로 마무리를 하 외로움을 느낄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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