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새싹이 자라는 느낌만으로도 설렌다. 교사의 장점과 단점은 한해살이라는 것이다. 장점으로 보자면 봄과 함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사의 1년이라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피어나고 자라고 수확하고 저물어가는 순리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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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만큼이나 별이 되고 싶었던 아이가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말이 더 앞섰고
사소한 책임도 끝맺지 못했다.
모든 생명이 주인공이듯
모든 아이들이 주인공인데
그 아이는 그걸 수용할 수 없었다.
타고난 참을성이 부족했고
생각과 행동을 일치하기 어려워
질책 어린 시선을 밥처럼 먹고 자랐다.
이젠 사회적인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듯
자신만의 생각으로 주변을 휘잡고 돌아다녔다.
점점 미움을 받았고
끝내 외면받았다.
그 아이는 마지막 수단으로
손에 똥을 묻혀 교실 벽에 발랐다..
그리고 이곳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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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가명)은 올해 만난 아이이다. 대체로 많은 아이들이 정서행동장애를 가졌고 증상에 따른 약을 먹는다. 똥별도 이완제를 작은 몸에 최대치로 처방받아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행동은 절제되지 못했고 주변은 늘 어지럽혀져 있었다. 충동은 조절되지 못해 뭐든 먼저 해야 했고, 심지어 은근슬쩍 순서 가로채기, 과제 안 하고 버티기, 원하는 대로 안되면 소리 지르기 등 불안정한 원자처럼 무질서해 보였다.
별똥별의 교육계획을 세우며 한 학기 목표는 자리정돈하기, 과제 완성하기였다. 소박하지만 이것이 목표가 될 만큼 수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별똥별은 특수학교에 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일반학교에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했던 많은 일들이 미움의 원인이 되었지만 여기선 별똥별의 행동에 일일이 찡그리고 화를 내는 아이들이 적었다. 교실벽에 똥칠한 사건은 집에서도 일어 났고 더 이상 안 되겠다는 판단하에 장애를 부정하던 아버지를 설득해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는 말을 하며 별똥별의 엄마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새싹처럼 아이들을 바라보던 때였다. 주말에도 나와 교실을 정리했고, 더 단정한 교실에서 아이들도 나도 안정되며 성장하길 바랐다. 정돈된 교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고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아가 보자는 다짐도 했다. 창문을 등지고 있던 책상을 창문이 보이게 옮기고 하늘이 최대한 보이게 책상을 배치했다. 자연이 주는 에너지가 교실에 들어오길 바랐다. 나도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며 숨을 쉬었다.
예상했지만 담임업무라는 게 힘에 부치고 타당하지 못한 잡무들이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타당하지 못한'이런 생각은 기름을 내 마음속 불씨에 붓는 것 같이 나를 힘들게 했다.
생활지도라고 통칭된 일과 담임으로 해야 한다는 업무들은 '알아서 책임져'라는 말처럼 무책임의 총체같았다. 그럼에도 수레바퀴의 톱니처럼 나는 하나의 톱니니까 더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고 단념했고 올 한해를 잘 마치는 것이 목표라고 되뇌였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 힘듦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끼리 힘을 주고받으며 한 해를 보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봉사활동을 온 것이 아니라 직업이었고 월급은 스트레스값이니 유난히 아이들의 문제행동이 폭발한 날은 '월급의 반은 오늘 벌었다'고 농담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 학기가 끝나가며 담임교체를 요구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으니 무엇보다 미안한 건 우리의 연대에 구멍을 낸 것이다. 근근이 힘을 내던 우리들의 끈은 풍선에 난 구멍처럼 힘을 잃어갔다. 내 몫이라 많이 미안했다.
그때도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이런 속을 더 태우지 않고 바람에 날려보내고 싶기 때문이다.호시탐탐 올라오는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우울의 농도를 흐려지게 하려는 노력이였고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나중엔 이런 글마저 쓰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래 글은 3월에 썼던 글이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교사를 하고 있다. 욕심내는 내면 아이가 없는 척 살아가고 있다. 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며 괜찮은 교사라는 말도 듣고 있고 적당한 예의나 태도를 보인다.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나에게 타인의 평가는 중요하다. 하지만 '적당한 역할놀이'가 균열을 보일 때가 있다.
욕심내고,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학생을 만날 때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마음속 아이가 솟구쳐 오른다. '어디서 이기적으로 굴어!, 욕심내고 너만 생각해!, 다른 사람들은 생각 안 해!, 어디 해주나 봐라, 참아'라고. 내 안은 전쟁 아닌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나에게 했던 그 말은 그대로 학생들에게 적용된다. 없는 척 못 들은 척 안간힘을 쓰고 참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사회적 역할이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와 함께 사는 내 몫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버텨내야 하루를 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날은 집에 돌아오면 땅끝이 꺼져 있는 것 같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에 나온 말이다. 삶이라는 'LIVE'는 라틴어의 '나아가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라틴어 수업을 읽은 지 몇 달이 지났어도 나는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계속 되뇌고 있다. 그것은 매 순간 선택하기를 주저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했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나아가는 것. 삶은 나아가는 것.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가보자고 나를 다독였던 시간이었다. 주저할 시간에 한걸음을 걸어보자고 다독이며 걸음을 걸었다. 나는 별똥별이 한 열 줄 되는 쓰기를 하지 않고 3시간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선호하는 활동에 제한을 두었고 과제를 완성하면 할 수 있도록 했다. 별똥별이 버티며 안 하다가 선호하는 활동을 못하게 되었을 때 화를 분출하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되었고 점점 책상위의 물건을 나를 향해 던지거나 책상을 발로 차는 행동도 나왔다. 우리는 서로 대치상황이 자주 연출되었고 나는 한줌 더 강한 모습을 보이며 허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 몸이 떨리고 있었다.
올 한 해 쉽지 않겠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대체행동을 고민했다. 과제의 양을 유연하게 조절해보기도 하고, 설득과 더 좋은 강화제를 제안도 해 보았다. 버티고 버티는 것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껏 버티는 행동으로 자신의 뜻이 관철되었던 경험이 별똥별을 만들었구나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이제 목표행동이 바뀌었다. 버티는 것으로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도 버티었다.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버티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과 내가 버틸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