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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롬 Dec 22. 2024

상담기록: 평범한 슬픔

공허함의 다른 이름은 구멍난 영혼


다시 개인상담을 신청한 이유는 공허함 때문이었다. 땅이 꺼질듯하고 나의 딱딱한 몸은 얼음처럼 바닥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무겁게 몸을 움직였고 하늘이 구멍이 났는지 나에게만 중력이 몇 배로 가동되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는 그런 평범한 날에 느껴지는 공허함은 참 이질적이었지만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우울감이었다.


하루 이틀 있었던 우울감이 아닌데 일상에 지장을 주게 된 것은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아서이다. 우울감이나 공허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 열심히, 바쁘게, 성취지향적인 삶을 살던 내가 더 이상 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대체제를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던 것이 내적 동기만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진으로 쓰러질 듯한 시간을 보내고도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줄은 몰랐다.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었다. '너 미친거야?' 라는 기본 멘트에서.. '이건 너무 이상한 일이잖아? 너 정말 힘들었잖아?. 안힘들었나? '라는 의심에서 호기심으로 다시 의심으로  다채롭게 란스러웠다.


코로나 시기를 보내고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이제 모든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을 갈아 넣은 시간에 영혼도 갈아 없어진 듯 흐물거리던 시기였다. 운전하며 이대로 과로사로 죽어도 아무 문제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죽는 것보다야 멈추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이제 겨우 안정되어가는 내 삶누리지도 못하고 아이들과 놀지도 못하고 이대로 막을 내리는 것은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가슴 한중간에서 느껴졌다. 스스로 다짐했었다. 멈추기로.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였다. 그 후로 4년이 흘렀고 이제야 삶의 속도도 늦추어지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일을 만들지도 않게 되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데 4년이 걸렸다. 달리던 자동차의 제동거리는 자동차 속력에 제곱에 비례한다고 하던데 나의 속도를 멈추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열심히 하는 것은 골치 아프고 해결하기 어려운 나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주었다. 새로운 일에 몰입감하며 도파민을 팡팡 맛보고 사회적 인정과 성취감까지 선물로 받는다. 이 달콤하고 유용한 것을 여태 20년 넘게 끊지 못했던 것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심'을 뺀 마음엔 다른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는 몰랐다. 수두룩 빽빽했던 명암은 없어지고 남겨진 존재자체는 불안의 총체 마냥 헤매였다. 그러고 있을 사이 원래 주인이었던 공허함이 다시 안방을 차지했다.


공허한 마음이 우울감으로 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원래 내가 주인이었다고 주장하듯 몸의 감각의 중심이 되어 나타났다. 명치에 죽순뿌리가 박힌 듯 통증이 오거나 몸이 사라지는 듯 형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두려움과 불안, 분노와 절망이 무서운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강한 감정이었지 옴짝 달짝 못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만성적 우울감은 미묘하고 서서히 느껴지는 것이어서 어느새 감정의 한복판에 놓여 있게 만들었다. 내가 불편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이미 증폭된 감정 안에 있을 때였다.


수업을 가는 복도에서 나는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처럼 몸이 녹아내려 바닥과 한몸이 되는 것 같다. 공허함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을 몰랐다. 두려움이나 분노를 다루는 것이 더 중요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런 강렬한 감정이 더 중요한 것이었지 공허함 같은 것은 배부른 사치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개인상담을 신청하고 첫회기 상담을 가면서도 신청한 게 잘한 건지, 괜히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상담 내용은 요약 재구성되었고 상담자는 이하 '상'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상: 무슨 얘길 하고 싶으신가요?

나: 그러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상: 천천히 하셔도 돼요.

나: 그냥 일상에서 느끼는 슬픔들. 아무도 모른다는 느낌들... 걷다가 바닥에 쫘악 달라붙어버리는 느낌들.. 그냥 바닥에 누워볼까 하는 충동들..


상: 우울이라고 표현했는데 감정을 더 표현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우울인지, 쓸쓸함이지, 외로움인지...

나: 사회적인 나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 칭찬을 받는 순간에도 외로운 거죠.


상: 가끔 세상에 혼자구나 느끼시나요?

나: 당연한 거라.

(중략)


상: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 볼게요. 잠시 그 마음을 내려놓고 몸에 집중하면서 호흡을 느껴볼게요. 안정화 훈련이라고 합니다. 호흡을 하면서 몸이 줄었다 늘었다 하거든요. 그 느낌에 집중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호흡을 하면 몸 안에 공간이 느껴질 거예요. 호흡의 공간일 수 있습니다. 공간이 느껴지면 저에게 얘기해 주세요.

나: 느껴져요.


상: 몸 안의 공간이 커졌다 작아졌다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몸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듯이. 잘하고 있어요. 지금 그 호흡을 제가 맞추고 있습니다. 선생님 호흡할 때도 제가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몸 안에 어떻게 느껴집니까?

나. 비어있는 것 같아요.


상. 그렇군요. 비어있는 공간을 느낍니다. 비어있는 공간에 지금 음악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 비어 있는 공간 안에서 들립니다. 그렇지요. 그 비어 있는 공간에 음악이 이렇게 울려 퍼집니다. 호흡과 비어있는 공간. 음악. 내 안에 이런 공간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자 그 공간은 음악이 흐르고 있고 비어 있지만 무언가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공간은 비어있는 것 같지만 치유의 공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공간이 지금은 어떻게 느껴집니까?

나. 공간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생생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뭔가 있는데..


상: 네, 그냥 그 공간에 머물러 봅니다. 내가 창조한 공간이기도 하고 내 의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너무 잘하고 있어요.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 (나는 막연해서 혼란스러운데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안심. 더 머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상: 이 공간은 따뜻하기도 하고 그 공간. 그 공간 속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안식처입니다. 내가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 속에서 진정으로 안정감과 휴식을 경험합니다. 그 공간 속에서 계속 머무십시오. 그건 샘이 만드셨고 샘의 공간입니다. 샘이 창조한 공간입니다. 내 안에서 내가 거합니다. 내 의식의 공간이기도 하고. 그 공간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우리의 안식처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어요.

나: (하. 눈물 또로륵....)


상: 그 안에서 외로움도 슬픔도 그 안에서 느낍니다.




내 안의 공간, 창조의 공간이기도 하고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고 그냥 비어있기도 한 나의 공간이라는 말이 상담을 마친 후에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안에서 외로움도 슬픔도 느낀다는 것이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내 마음에 닻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상담은 계속 진행되었고, 나는 공허함이라는 감정의 시작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어린 나'가 있었다.


다음 회기가 진행될 때까지 '나안의 공간'을 느껴보면 좋겠다고 상담사는 말했다. 나는 틈틈이 외부로 가는 시선을 나의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것만으로 삶의 핸들을 내 손으로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공허함과 같은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성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우울감은 아이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남겨둔 채, 거짓자아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진정한 자아를 버린 만큼 사람의 마음에는 빈 공간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상태를 나는 '영혼의 구멍'이라고 부른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John Bradshaw p.5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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