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있었다

뜬금없이

벚꽃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 우연히 벚꽃과 마주쳤다. 명동 근처를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남산 초입까지 흘러들어 갔는데, 멀리 벚꽃 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서 벚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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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모습을 보여주다니 세상에, 벚꽃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감사할 지경이네'라는 표현은 조금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있는 것 같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고 할까. 이 표현은 너무 겸손한 표현 같아 좀 그렇고, 산뜻하게 ‘감사했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감사한데, 그게 좀 복잡 미묘한 감사함이다. 사실 나는 벚꽃을 엄청 기다렸다. 지난 3월 말부터 남산에 벚꽃이 '피었다'는 글인지 '필 것'이라는 글인지 모를 낚시글과 사진을 보고 이미 날을 잡고 지지난주에 한번 남산에 왔던 것이다. 엄청난 것 까지는 아니지만 벚꽃 순례를 위해 걸을 만한 코스도 생각해놓았었다. 그런데, 그땐 아직 개화시기가 아니었는지 벚꽃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살짝 실망한 채 터덜터덜 돌아왔던 기억을 멀리 하고, 그즈음 4월 초부터 SNS에 제주와 부산에는 벚꽃이 피었다며 벚꽃 명소와 벚꽃 사진들이 자주 피드에 보이는 게 아닌지.


한반도가 그렇게 기온 차이가 많이 나는 걸까. 나는 언젠가 벚꽃이 나에게도 모습을 보여주겠지, 혹은 개화시기에 다시 남산에 와볼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근래에 한 번 더 남산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었다. 경리단길을 걷다가 남산으로 빠져나왔는데, 그때 한동안 짓궂고 변덕스럽던 날씨가 봄 날씨처럼 조금 온화한가 싶더니 노란 개나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에도 유독 제주와 부산에 만개했다는 벚꽃이, 남산에 만큼은, 아니 나에게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한주 정도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남산 근처에는 와보지 못했다. 남산이 아니어도 벚꽃 명소는 많지만 익숙한 동선인 윤중로 말고 조금 한적한 곳에서 벚꽃을 보고 싶었다. 남산도 한적하지는 않지만 막연히 짐작컨대, 이곳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해서 체력적으로 맘 잡고 와야 하는 곳이라 상대적으로 한적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혼자 이곳을 벚꽃 볼 곳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다 엊그제는 거주하는 곳 근처의 공원에서 목련나무 몇 그루가 만개한 것을 봤다. 역시 같은 시기, SNS에는 제주와 부산, 경주까지 벚꽃 명소라며 벚꽃 관련 사진과 글들이 보이는 게 아닌지. 아, 물론 목련도 자세히 보면 예쁘다. 하지만 왠지 봄 하면, 이 시기에는 흔하디 흔하지만 이내 초속 5센티미터로 사라져 버리고야 마는 벚꽃이 봄의 속성을 축약해 놓은 듯하여 벚꽃이 제격이지 않을까 하여 여하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건만. 나에게는 오랜 기다림을 주면서 유독 다른 곳에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벚꽃이 인색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야단스러움에 약간 심통이 났다. 그러다 슬슬 마음을 놓던 중이었고, 여기저기서 벚꽃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벚꽃에 대한 마음은 좀 놓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봄은 만끽해야지 싶어서 어제는 가까운 수목원에 가려고 수목원 티켓을 예약했다. 그런데, 서울 경기권 수목원은 대체로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는지 교통편이 불안 불안한 게 아닌지. 웬걸. 역시나 대중교통으로 가려니 중간 지점부터 목적지까지 노선이 하나라는 마을버스가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니 교통편으로는 답이 안 나와서 행선지를 수목원에서 교통편이 있다는 근처의 예술마을로 선회했다.


예술마을에 도착하니 정말 예술적인 볼거리들이 가득했지만, 막상 너무 지쳐있는 바람에 벤치에만 앉아있다가 왔다. 아, 수목원에서 보지 못한 뭔가를 보려는 보상심리에 이곳에서 다른 걸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너무 지치기도 했고 마침 시야가 확 트인 공원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왜 그렇게 좋은지. 그 공원의 벤치에서 다른 계획들을 내려놓고 하늘과 닿아있는 평지만 한참 동안 멍하니 보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렇게 삽질한 게 어제의 일이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벚꽃에 집착했는데, 오늘 그냥 뜬금없이 걷는데 그 길에 그렇게 벚꽃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스포일러에 다름 아니다. 날 잡아서 온 뒤에 벚꽃 길 따라 걸으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벚꽃이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봄을 기다렸기 때문인 걸까. 벚꽃이 지는 속도만큼 봄도 빨리 지나갈 것만 같아서 한참을 벚꽃, 아니 봄소식에 매달리며 봄을 잡아두려고 했던 것 같다.


이내 뭔가 착잡해졌다. 모습을 보여줘서 고마우면서 착잡한 마음. 그렇게 남산 초입에서 멀거니 벚꽃을 한참 감상하다가 다른 이유로 지쳐 있어서, 아니, 초반에 너무 힘을 빼서 인지 여하튼 지쳐 있어서, 남산에 들어가 벚꽃길을 걸으려는 마음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이번 봄이 가기 전에 다시 날을 잡고 와야겠다. 이곳이 아니어도 언제 어디에선가 오늘 교통사고 난 것 마냥 벚꽃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우연히 벚꽃이 들려주는 봄소식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모르겠다. 혼자 한 약속이라 약속을 지키러 다시 이번 봄에, 벚꽃 있을 때, 남산에 와야 할 것 같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조금 더 기다리면서 혹여 남산에서 벚꽃을 아니, 봄을 만나게 되면, 그곳에서 올해의 봄을 아니, 벚꽃을 잠시 담아두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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