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사회상규
루나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바의 한 구석이었다. 바의 조명은 어둡고, 사람들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남자였다. 그는 늙었지만,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망토와 칼을 찬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자신을 왕자라 칭하는 남자에게 흥미가 생겨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왕자는 술잔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세상을 느끼고 있지"
허세 낀 말투에 흥미가 생긴 루나가 왕자의 옆에 앉는다. 그러곤 이상하게 생긴 그림을 가진 것을 보고 질문을 한다.
“이건 뭐야? 그림 같은데. 모자를 그린 건가?”
왕자는 모자 그림을 보며 말한다.
“이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야.”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냥 모자 아닌가? 어딜 봐서 뱀이야” 그러나 왕자는 고집스럽게 우겼다.
“아니, 이건 분명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지.”
루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모자인 걸. 보아뱀으로 볼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어. 설사 네가 이걸 뱀이라 우길지라도 사회상규상 받아들이기 어려워. 적어도 사회적인 약속은 지켜야지 모자를 그리고 뱀이라 우긴다고 뱀이 돼버린다면 세상은 혼란해질 거야.”
왕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 그렇게 잘났으면 내 마음에 드는 양을 그려봐.”
"그거야 쉽지."
루나는 마법을 사용해 양을 그렸다. 마법으로 양을 그대로 불러왔기에 그림이 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길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왕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생각한 양이 아니야.”
그러곤 박스를 보며 말했다.
“이 박스 안에 있는 양이 내가 생각한 양이 거든. 네가 그린 양은 너의 주관이 들어간 양일뿐이야.”
루나는 앞에 있는 바텐더에게 물었다.
“저 남자의 정신이 나간 건야?”
바텐더는 린넨으로 잔을 닦으며 말한다.
“그렇죠. 저 사람은 장미랑 결혼하고 싶다고 징징대는 조금 아픈 사람이에요.”
루나는 왕자와 대화를 끝내기 위해 바텐더와 대화를 시작했다.
“이곳은 참 넓은 곳이네요.”
바텐더는 대답했다.
“여긴 전 50만 마르크를 주고 산 70평짜리 바예요.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왕자는 그 말을 듣고 탄식했다.
“사람들은 왜 숫자가 아니면 이야기를 못하는 걸까!”
루나는 다시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뭘로 이야기하란 거야? 구체적인 수치로 이야기하는 게 직관적이잖아.”
왕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내 남루한 차림을 보고 무시하는군. 예술과 철학을 모르는 족속들! 내가 양복을 입었어도 그렇게 말할 건가?”
루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애초에 옷차림은 논외야. 난 당신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잖아. 사회상규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 예술과 철학?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온 지 모르겠지만 예술과 철학도 상황에 맞게 논해야지. 또, 예술과 철학을 몰라도 잘 살아가는 사람도 많아.”
"정말이지. 정말 이상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군. 지긋지긋해!"
왕자의 탄식 섞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나는 쏘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세상은 이상한 곳이야. 그렇지만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았고. 이상하지만 서로 이해하면서 사는 거고, 맘에 안 들어도 맞춰서 살아가는 곳이야. 서로 존중하면서 사는 곳에서 사회 탓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왕자는 이야기를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한다.
“장미가 보고 싶군요. 내 소중한 장미.”
“자기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에만 정을 쏟으면서 왜 남이 그러는 건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너는 참 나빠. 권위를 세우는 왕, 허영심 넘치는 아저씨, 술꾼, 사업가, 지리학자만큼 나빠!”
“내가 보기엔 너도 나쁘거든. 서로 다르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피차일반인데, 본인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는 다 누군가에겐 이상해. 그렇지만 서로 존중하며 사는 거죠. 네가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들도 결국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건 똑같은데 왜 나쁘다 생각하는 거야? 적어도 그 사람들은 철칙이 있고 뭐라도 하는 사람들이잖아.”
왕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이상하고 외로운 지구에 오는 게 아니었어!”
루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참으로 편한 생각이네. 외로운 건 네가 이 행성에 적응하지 못한 언행을 보이니 자업자득이잖아! 어리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지. 오래 살았으면서 그러는 건 추하군.”
그때 바 안으로 여우가 들어왔다.
“왕자, 너 또 이러고 있어!” 여우는 루나와 바텐더를 보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왕자가 다른 행성에서 와서 적응을 잘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한 번만 이해해 주실 수 있나요?”
루나는 생각했다. 자기도 다른 세상에서 왔는데, 고작 다른 행성에서 왔을 뿐인 왕자가 너무 이해심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