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앎.

by c jeong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인간을 괴롭게 만든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아는 것 또한 좋다. 그러나 잘 안다면 그것 또한 지나가는 일부로서 피해 갈 수 있을까. 나는 예술이고 우리는 작품이다. 과거의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무한한 창조를 시작하였고 그 창조는 오늘날에 도달했다. 한글 또한 인간의 필요, 삶,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해 ‘개발 : 계발’ 되며 창조 됐다. 또한 우리의 글은 과거 복속 국가였기에 한자 사용이 불가피한 시대상 속에서 서민을 위해 창조되며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공동생활을 이룬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불가항력적으로 ‘악’이 축적되며 선과 악의 소용돌이를 생성한다. 또한 무지는 ‘악’과 ‘선’을 생성한다. 지혜, 지식 또는 앎 또한 ‘악’과 ‘선’을 생성한다. 어느 것 하나 ‘나쁘다’,’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술이란, 이렇듯 무한한 삶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또한 나약한 존재를 위한 안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자청한다. 또한 과거에서 현재까지를 이루며 나약한 존재들의 삶인 인간 삶에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유정 : 有情’이다.

세상의 기준이 내가 될 수 없으나 나의 기준을 세상에 대입해 나는 생각한다. 또한 과거에서 현재까지를 이루며 나약한 존재들인 삶인 인간 삶에서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유정 : 有情’이다.

세상의 기준이 내가 될 수 없으나 나의 기준을 세상에 대입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어떠한 사람이 나에게 선을 행하고 있으며 그들이 나를 도와주는지 나름의 도움의 방향이었을까. 인간은 고등 교육을 받고 그 이후에 더 많은 교육을 받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제는 지속해서 발생한다. 나는 내가 낮은 위치에서 항상 노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순탄치 않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다. 인간이 행하는 행동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친절하고 좋은 것일까. 그 법이 생산된 까닭은 나를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의 가족과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을까. 때로는 지나침 때문에 또는 잘 모르는 사실 때문에 사람은 오해하고 곡해한다. 부정확한 사실은 사람을 혼돈되게 한다. 때로는 너무 모르는 상태. ‘무지’의 상태는 내가 좋은 것을 받고 있는지 내가 나쁜 것을 받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된다. 이것이 비 정확한 정보인지 또는 정확한 정보인지 인간은 어지럽기 때문이다. 내가 어지러웠던 것도 너무 지나친 ‘말’의 사이에서 어지러웠다. 누군가는 잘못된 정보인지 진짜의 정보인지 모를 무수한 것들을 말한다. 또한 무엇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는 것, 무수한 생각과 무수한 시각의 변화를 생성한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에는 변화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습관처럼 베어져 있는 행동들. 그 행동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통해서 변화되더라도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남아있다.

타인을 ‘착하다’라고 이야기하는 누군가는 나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긍정적인 또는 믿는 자이다. 나를 ‘나쁘다.’라고 이야기하는 누군가는 나의 행동에 의의를 제기하는 자.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자이다. 나는 간혹 인간의 행동에서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그 행위가 굉장히 타인의 관계를 헤치는 경우를 보았다. 또한 이는 누군가를 언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 심리적 공감을 받고자 하는 것의 사이에서 정확성이 없음에도 정확성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지만 ‘타자’는 알고 있지 않을까. 또한 누군가는 그곳에서 본인이 될 수 도 있으며 타자가 될 수도 있다.


keyword
이전 09화나의 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