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를 내는 건 괴물이야
한 날, 나는 오랫동안 묵혀 놓았던 D에 대한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며 그와 계속 상호작용 해야 하는데 이 답답함과 불편함을 어떻게 달래며 그와 소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했다. 상담가는 투명의자 기법 혹은 빈 의자 기법을 해보자고 했다. 투명의자 기법은 현실에서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상담 장면에서 그 대상이 빈 의자에 앉아있다고 상상하며 상호작용을 해보는 방법이다. 학부 집단상담 수업에서 해본 경험이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D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는 간단한 하지만 한편으로는 낯간지러운 작업이었다.
솔직히 빈 의자 기법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D에게 내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그가 나의 힘듦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나? 이 대화가 의미가 있을까?’ 이럴 때면 이건 내 감정에 대해 판단해보는 걸까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짧은 식견보다는 상담 선생님의 통찰에 나를 맡기고 그에게 섭섭했던 일화들을 하나씩 억지로 늘어놓았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그때, 당신이 이렇게 했을 때 섭섭했고,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저는 그때 많이 힘들었거든요."
라고 몇 마디 말하곤 이제 다 말했다고 끝내버렸다.
"화를 내거나 욕을 해도 돼요!"
나는 욕을 해도 된다는 말에 놀라 그 정도의 감정은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상담가는 빈 의자 기법을 해보니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평온한 기분이에요.”
상담가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화가 나면 어떻게 해요? 화를 내나요? “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화가 난 적이 없었던 게 아니라, 화가 나는 상황에 바로 그 화를 표출하며 표현한 적이 드물었다. 화가 나면, 일단 당사자가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감정을 하소연하는 식으로 감정을 풀었다. 화가 나게 한 대상과 계속 마주쳐야 해서 그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을 때면 그 사람에게 대화를 나누자고 요청하고, 차분하게 어떤 부분에서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이야기하고, 주의해달라고 말해 왔다.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면, 아무 말 없이 그 사람을 끊어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말이다.
“왜 화를 내지 않나요?”
“화를 내기 싫어요. 화를 내는 건... 아빠랑 제가 똑같아지는 일이에요.”
슬픔처럼 나는 분노도 절제했다. 평생을 안정감과 평온함을 추구해왔던 나로선 어떤 감정을 극적으로 느끼고 표출하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내 인생의 평온함을 깨고 부모님과 함께 살 때처럼 삶을 시끄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화를 절제하는 건 내가 아빠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설정해 놓은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 안전장치를 해제하게 되면, 나는 나도 몰랐던 괴물 같은 내가 튀어나와 누군가의 마음을 해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내가 아빠의 분노에 고통받았던 것처럼.
상담가는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상대방도 나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화난 것 같으면, 화를 풀려고 해 줄 수도 있고, 더 이상 그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음부터는 화가 나지 않게 조심할 수도 있는데, 내가 그걸 표현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르기 때문에 내 감정을 배려해줄 수가 없다고. 매번 틀어질 때마다 절교를 하기에는 그 사람에게 쏟은 마음과 진심이 아깝지 않냐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친구들에게 화가 나도 말한 적 없었던 것과,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가 친구가 화들짝 놀랐던 순간 등등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어. 각자 기분 나쁜 요소가 다를 수 있기에, 내가 무엇이 기분 나쁜지 티를 내야 상대방도 그에 맞는 배려를 해줄 수 있는 거였다.
“제가 화를 내도 된다고 했을 때, 무진 씨에게는 그 방법이 익숙하지 않으니 화를 내지 않겠다고 했죠. 그리고 보통은 감정을 털어내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데, 무진 씨는 평온하다고 했어요. 마치 마음을 정리하듯이요. 그 부분이 특이하다고 느껴졌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다 보면, 긍정적인 감정마저도 느낄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사람은 행복하려고 사는데, 행복하려면 즐겁고 기쁘고 신나는 일들을 해야 하는 데, 계속 그렇게 감정을 절제하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돼요.”
“무감한 상태였던 적이 있어요. 어떤 친구는 내게 평온함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말해준 적도 있었죠. 한 날 고모는 제게 ‘무진아 소리는 좀 지르고 사니?’라고 물어봤어요. 저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울었어요. 다른 사람에겐 다 보이는데, 저만 몰랐네요.”
“요즘 무진 씨는 욕구를 알아차리는 부분은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건 더 연습이 필요해 보여요. 대상을 두고 연습을 해 봅시다. 잘할 필요도 없고, 이성적으로 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내보여 봐요. 여긴 상담 장소잖아요. 혹시 이 작업을 하다가 나를 뭔가 가로막는 게 있다면, 그것마저도 다 이야기해주세요.”
나는 그게 제일 힘든 사람인데, 상담 선생님은 항상 내게 제일 어려운 것만 골라서 해보자고 하신다.
그저 무섭다. 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
무서운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없이 무서웠다.
나도 이렇게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