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늦은 오후, 얼마 뒤면 저녁 먹을 시간이다. 이제 프로야구 중계도 끝났고, 낮잠을 다시 자기에도 애매하다. 한 30, 40분 정도 뒤면 이번 주말의 마지막 식사가 시작된다.
잠시 아내 눈치를 보다 나는 아파트 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내려와 비상계단 창문에 기댄다. 식도 끝에서부터 움찔움찔 조심스럽게 긴 호흡을 뻗어 낸다.
“아~~~~"
소리 없는 깊은 신음.
아직 힘이 남은 태양이 도봉산 자락에 걸쳐 흐느적대는 구름 떼와 겹치면서 콜로라도 협곡 같은 노을을 뿌려낸다. 린넨 위에 온몸의 힘을 뺀 화공이 한 획으로 그려낸 듯한 그림 한 폭이다. 황금빛, 핏빛, 주황빛, 검은빛 등 하늘에 그려진 협곡이 서울의 마천루와 산자락을 걸치듯 떠내려 간다.
“후~~ 우우우....., "
단전에서부터 무언가를 몰아내듯 한 모금 길게 내뱉는다. 주말에는 가급적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 한다. 주중에 피우는 담배도 많은데 굳이 주말까지 몸을 해칠 필요가 없어서다. 그렇긴 해도 이 시간만큼은 담배 한 대를 외면하기 어렵다. 굳은 의지도 별 수 없다.
풀무질에 한껏 달아오른 철은 생명처럼 붉다. 빨아들이는 한 모금 숨이 담배 불씨에 찰나의 생명을 준다. 약이 빠짝 오른 붉디붉은 생명. 타들어간 자리에는 희뿌연 재만 남는다. 고개를 떨군 담뱃재, 매마른 나무 가지가 부러지듯 아파트 비상계단 창가 틈새로 힘없이 떨어진다. 타다 남은 불씨를 오른손 검지로 힘차게 튕긴다. 필터만 남기고 담배는 사라졌다.
불씨는 화단에 제대로 착륙했을까? 아니면 떨어지는 중에 소멸되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아아~~~, 저리다'
나는 되뇐다. 내 재주는 빈약해서, 이 시간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냥, 마음이 저리다. 그 말밖에 없다.
저녁을 먹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날이 밝으면 나는 또다시 핑계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때깔 좋은 검은색 양복, 브랜드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입고 있지만 나 자신은 당당하지 못했다.
이런 예감에서인가…, 그래서 나는 메말랐고 저렸다. 타들어가는 담배 끝 자락을 보면서 나 자신도 함께 저미어 갔다. 나는 금세 붉은 생명의 담배 끝에 지져졌고 이내 재가 되어 메말라 버렸다. 흩날리듯 떨어지는 담뱃재. 마치 나와 같다. 한층 어둑해진 땅거미와 노을이 밑밥 까는 영화 배경처럼 뒤섞인다.
‘내일 가서 뭐라고 하지. 지난주에 대비해서 별다르게 진척도 없는데...., '
나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다. 아무리 변수를 감안해 짜놓은 전략과 전술이라도, 막상 실행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지곤 한다. 목표를 세우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정작 그 목표에 닿는 일은 드물다. 경제나 부동산 전문가들의 예측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그린 시나리오는 일정 범위 안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세상은 늘 그 틀 밖에서 움직인다. 경제든 정치든, 논리는 예상한 대로만 굴러가진 않는다.
‘이야 그런 것까지 고민해'라는 자조 섞인 온갖 전술에다가, ‘내일은 없고 지금 당장해야 한다'는 강한 실행에도, 세상은 자기 주관대로 흐른다. 그래서 자연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자(自)에 그러한 연(然).
‘분명히 상상 외의 기억력으로 이전 것들을 꼬치꼬치 짚어 내면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텐데..., 똑같은 걸로 매번 깨지는 것도 정말 못해 먹을 짓이네, 그런데 오전 회의는 그렇다 치고 오후 아시아퍼시픽(AP) 리더 보고에는 뭐라고 하지.'
복도 창문 옆에 머리를 기댄 내 상념은 어느새 두 번째 담배를 들고 있다. 한두 모금 당겼다가 체념한 듯 담뱃불을 툭하고 튕겨낸다.
‘에라,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흐를 테고..., '
‘죽을 쑤든, 팥을 쑤든, 내 인생도 흐른다.'
‘아, 그런데... 근데 내일 뭐라고 말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