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9일, 월요일. 나는 퇴사했다.
1주일가량 푹 쉬었다. 늦잠도 자고, 한강 변을 따라 자전거도 타고, 눈 내리는 관악산도 다녀왔다. 하산 길에는 조그만 목욕탕에도 들렀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가던 전형적인 시골 스타일 목욕탕이었다. 어른 서넛이 겨우 들어갈 만한 욕탕, 꽃무늬 타일로 마감된 벽면, 수분에 절어 삭아가는 목재 바닥이 삐걱거리는 습식 사우나, 대여섯 개의 좌식 의자 등.
서너 시간의 등산으로 노곤해진 몸을 미끄러지듯 맡긴다. 저르르, 저주파 치료기의 전기 자극 같은 것이 피부와 뼛속을 관통한다. 몸이 녹아내린다. 다리, 허리, 가슴, 머리, 어깨 순으로 열이 오른다. 요즘 들어 히말라야 봉우리처럼 시린 양 어깨까지도 꼼꼼히 열기를 퍼트려야 한다. 목 아래 언저리까지 몸을 담근다.
아버지는 목욕을 참 좋아하셨다. 내 기억엔 한 주도 거르신 적이 없다. 주말마다 목욕탕에 가셨고, 언제나 나를 데리고 가셨다. 무슨 의무라고 되는 듯, 당신은 항상 내 몸을 직접 씻겨 주셨다. 갈비뼈 부분에 때 타월이 닿기라도 하면,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활처럼 움츠렸다. 피부가 얇은 부분을 밀 때면 정말 따가웠다. 나는 의식처럼 반복되던 "때밀이 시간"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의식이 끝난 자리엔 시뻘겋게 달아 오른 살결만 남았다. 다음 주말 목욕에 대비해 손상된 피부를 서둘러 복구해야 했다.
나도 두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다녔다. 그때의 아버지처럼. 뽈록 튀어나온 올챙이 배, 미쉐린 타이어 광고 캐릭터 같은 짧퉁한 다리, 말랑말랑한 피부 등. 악의라고는 하나 없는 천사가 장난기 가득 목욕탕 여기저기를 누볐다. 그랬던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나는 혼자 목욕탕을 찾는다.
'지금 내 나이의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사셨을까?'
욕탕 가장자리를 베개 삼아 눈을 감는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견디지 못하고 내 얼굴 위로 툭 떨어진다. '이런 순간을, 불가(佛家)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2월 셋째 주는 수요일부터 주말까지 설 연휴였다. 설 전날엔 본가를, 당일 오후엔 처가를 찾았다. 명절이 늘 그렇듯 저녁 식사 자리에 그간 못다 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술이 곁들여지고, 취기가 돌자 말도 하나둘 늘어났다.
“제가 말이에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교수가 될 거예요"
장모님께도 한 말씀드렸다.
“어머님, 이제 딸 걱정 마세요. 앞으로 교수 사위 보시게 될 테니까 기대하세요."
이미 소문으로 아는 친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어떤 친지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결의가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한 가장(家長)의 결정이 가정의 미래에 몰고 올 파장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없는 이는 외면했고,
안타까워하는 애틋한 눈빛을 보냈고,
의구심 어린 침묵으로 답을 대신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무모함에 대해서 만큼은 대체로 응원을 보내 주었다.
'난 이미 퇴사했고, 박사과정 입학허가서 받았어. 이미 전부 엎질러진 물이야.'
취기는 자꾸만 내게 최면을 걸었다.
돌.
아.
갈.
길.
없.
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는 내 결단에 더욱 집착했다. 이런 때에는 결정이 얼마나 올바른 지 보다 '내가 결정했다'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나는 이미 공기 중에 파장으로 선언되어 버린 나의 결정을 더욱 신봉했다. 이런 걸 맹신(盲信)이라 해야 할까? 결정은 관성을 수반하고, 관성은 결국 극단으로 흐른다.
소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던진 폼나는 출사표는 아니었다. 40대 중반의 내 인생 리셋 출사표는 어수룩하게, 그러나 담담히 던져졌다.
아내는 내 옆에서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왜일까. 자꾸만 아내와 결혼을 앞두고 처음 처갓집을 찾았을 때, 안방 벽에 걸려 있던 액자의 글귀가 떠오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장 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