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상자 하나에 담긴 17년

퇴사하는 날

by 명연재

어김없이 월요일 아침은 왔다.


6시 10분. 출근 알람이 울린다. 3~4분가량 이불 속이 선사하는 포근한 천국을 만끽하다, 두 다리를 들어 돌리며 튕기는 반동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밀어 침대에서 일어 난다. 곧바로 침실 옆 욕조로 간다.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에 샴푸를 쏟는다. 머리 전체에 충분히 샴푸가 먹고 머릿결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양손으로 머리를 치댄다. 샤워기를 잡고 머리를 헹구고 수건으로 대충 큰 물기를 털어 낸다. 다시 거실에 있는 화장실로 옮겨 가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머리가 거의 말라 갈 때쯤, 이 때부터가 특히 중요하다. 머리 가르마가 어떻게 타지는 지가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기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르마는 오른쪽으로 타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니까 근 30년 가까이 된 습관이다. 잘 된 가르마는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가르마가 귀와 정수리 사이의 비율을 6:4로 잘 가르는지, 둘째, 가르마 선이 얼마나 제대로 된 직선인지, 마지막은 가르마 끝에 해당하는 머리 가마 부분이 부풀지 않고 안정되게 마무리되었는지, 이들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룬 가르마가 완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는다. 가르마가 잘 되면 인물도 덩달아 살아난다. 욕실 창에 비친 내 모습, 멋지다.


'좋은데...'


손으로 비벼 뻑뻑해진 무쓰로 머리를 우선 고정한다. 이후 오른쪽, 왼쪽, 머리 위와 정수리, 그리고 뒷 머리 순으로 스프레이로 한 바퀴 뿌리고 나면 비로소 머리 손질이 끝이 난다. 스킨과 로션이 합쳐진 올인원 화장품을 얼굴에 탁탁 두 번 치면서 바른다. 화장품이 얼굴 볼과 이마에 윤기를 더한다.


이제 다음 스텝, 아침 식사다. 결혼 이후 나의 아침 출근 동선과 준비를 20년가량 맞추어 온 아내가 물어본다. "쌀국수 해 줄까? 아니면 된장찌개?" 속이 편할 때는 밥류를, 피곤하거나 숙취가 있을 때는 국수류를 아침밥으로 먹는다. 아내가 차려 준 아침밥을 정성껏 먹는다. 나는 밥을 남기는 법이 거의 없다. 원체 아침밥을 잘 먹어서인지, 귀찮을 만도 한데 아내는 아침밥 준비를 웬만하면 거르지 않았다. 아내에게 희한한 구석이 있긴 하다. 결혼 초에는 특기 음식이 칼국수랑 순두부 딱 2개뿐이고 음식 준비 하는 데만 1~2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 요사이는 특별히 따로 준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채 2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아침밥을 뚝딱 내놓는다.


'뭐지? 어떤 비법이 있는 거지?' 나중에 알게 됐다. 비법은 그 동안 주부 경력으로 빨라진 손도 있었지만, 요사이 한층 다양해진 입맛을 사로잡는 간편식도 한몫했다.


식사를 마치면 TV를 켜고 욕실에서 치약을 묻혀 나와 양치를 시작한다. 오늘의 날씨와 밤새 일어난 주요 뉴스를 훑어본다. 날씨에 맞추어 바지와 셔츠, 조끼, 외투 등을 걸치면 비로소 출근 준비는 끝이 난다.


아파트 10층 엘리베이터에서 아내의 배웅을 받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다. 어제 주차해 뒀던 내 차를 향해 가며 리모컨으로 차 문을 연다. "삑삑" 시동을 걸고 힘찬 엔진 소리를 확인하고 10초를 센다. 10초는 오랜 시간 주차장에서 잠들어 있던 내 차가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배려하는 시간이다. 10년이 넘도록 나의 다리 역할을 한 나의 차 '대망'에게 속삭인다. '대망아,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해.' 사람들이 왜 차 이름이 대망이냐고, 크게 망하는 거냐고 물어보는데 그렇지 않다. 대망은 클 대(大), 바랄 망(望)이고, 큰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차에 붙인 이름이다.


나의 첫 직장 출근일은 1998년 5월 4일이다. 나는 이 날짜를 애써 기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IMF 외환위기가 내게 잊지 못할 기억을 준 덕분이다. 설레고 푸릇푸릇했던 첫 출근일. 이후 나는 근 17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아침 루틴을 유지하며 출근했다. 내 직장의료보험자격득실원이 말해 준다. 이직하는 주말을 정도만을 제외하고 공백 날짜가 없다.


오늘은 회사의 모든 업무를 정리하고 떠나는 날이다. 2월 초라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다.


어떤 일은 굳이 기억하려 않아도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 여기에 상처가 자기만의 흔적을 더하면 그 기억은 새로이 창조된다. 나는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고 기업 도산과 실업 위기가 한창이던 그해 2월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2년 정도 대학원에서 더 잘 준비하면 사회생활을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수월하게 시작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IMF 사태는 현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실상은 몇 년 전 먼저 직장을 잡은 대학 친구들이 위너(winner)였다.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 했던가.


당초 2월 초였던 나의 입사일 또한 기약 없이 미뤄졌다. 입사하기로 했던 회사의 인사담당자에게 전화하니 걱정 말라며 곧 연락을 준다고만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IMF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4월 4일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할 때 나는 본의 아니게 백수였다. 출근하는 아내를 뒤로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안갯속에, 서리발이 내린 공원 길을 따라,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나는 달렸다.


백수인 나는 너무 미안했다.

“지금은 이렇지만 나는 잘되고 말 꺼야!!!”


사물함을 정리하는 데는 골판지 상자 하나면 넉넉했다. '대학원도 마치고 IMF 위기를 뚫고 취직해서 지금까지 17년이나 근무했는데...' 무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시간이지만, 현실은 무채색이고 덤덤했다.


얼마 전에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관식에 참여한 적이 있다. 물끄러미 나는 고인을 바라보았다. 고인을 맞은 가족들은 오열했다. 그들의 애통한 모습이 내 감정을 한 순간에 휘몰아치게 했다. 굵은 눈물 방울이 볼을 적셨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들이키며 삼켰다. 수분이 많이 빠진 이모부는 수축되었고 창백했다. 그저 고요했다. 고인은 내가 알아 오던 것보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로 모두 왜소했다. 하나 고인과의 마지막 시간을 잡으려는 유족은 집요했다. 생기를 띤 유족의 모습과 대비하여, 고인은 흑백 무성 영화에 머물렀다.


회사를 떠나기로 한 이날, 나는 큰 이모부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감상에 빠졌다. 나는 무채색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본사 건물은 바벨탑처럼 마천루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었고, 나는 종이상자 하나를 들고 회사 정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목에 차고 있던 사원증을 줄로 돌돌 말아 접어 종이 상자에 넣었다. 언제 다시 이 사원증을 찰 수 있을까? 종이박스 안에는 머그컵, 식물을 키우던 화분 한 개, 사진 몇 장, 회사에서 받은 상장, 퇴사 안내 서류 그게 다였다. 이제 나는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날 참이다.


회사 앞 흡연 장소 앞에서 담배 한 개비를 베어 물었다. 시원 섭섭, 절치부심, 새로운 결단과 시작 등. 진부한 단어들을 떠올릴 시간을 가질 새도 없었다. 내 속사정엔 서툴러도 얼굴만은 낯익은 선후배 동료들이 이런저런 인사를 해 왔다.


"퇴사한다며? 돈 많아? 박사 과정 가기로 했다고?"

"미친 거 아냐? 그냥 버티지..."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니 형님보다 형수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꼭 놀러 갈게요."


퇴사 의사를 드러낸 후, 인사 절차는 기계적으로 진행되었다. 40대 중반의 인력이 퇴사한다고 하니 회사는 반기는 분위기였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퇴사 가이드를 따라 순서대로 몇 군데를 방문하니, 반나절도 채 안되어 모두 끝이 났다.


퇴사를 결심하던 중에 관련 퇴사 규정을 살펴보았다. 회사는 직원경력개발 제도의 일환으로 무급휴직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건은 학위 과정, 자비 부담, 그리고 최장 2년이었다. 만에 하나를 생각해야 했기에 나는 2년간의 무급휴직 형태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사실 이때 몰랐다. 살면서 순간 순간의 결정, 대수롭던 아니던, 때가 차면 답을 요구했다. 어김없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4살에 박사를 시작한 나는 행여나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건 사치였다. '배수의 진', 오직 이 마음뿐이었다..


'가장인 내가, 이 나이에 시작했다가 몇 년을 도로아미타불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되지도 않는 소리야.'

'웃기지 마, 보란 듯이 반드시 학위 받고 누구나 수도권으로 알 만 한 대학의 정식 교수가 되고 말 거야.'


40대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건만.


회사의 모든 업무를 정리하고 퇴사하는 이 날, 나의 마음은 모질기가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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