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약속이 시작된 곳
'왕징'望京은 북경 관광지로서 흔히 찾는 곳은 아니다. 왕징은 현지인들이 살아가고, 일을 하는 생활주거 지역에 해당한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해서 '한인 타운'으로 불리기도 한다. 짧은 여행 일정 중 왕징을 방문한 건, 이번 여행의 목적인 실낱같은? 추억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교환학생 시절, 왕징은 학교와 같은 지하철 라인에 위치했다. 시험 기간이 끝났을 때, 기분을 내고 싶을 때, 우리는 한국 음식점이 즐비한 왕징을 찾아갔다. '서래갈매기' 고깃집에서 포식하고, '돈치킨' 치킨을 포장해 와서 야식으로 먹곤 했다. 비쌌지만 아는 맛이 제일 맛있던 시절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출국 하루 전 날, 나와 친구는 마지막으로 왕징을 찾았었다. 점심으로 냉면과 꿔바로우를 먹었다. '우리 참 잘 있다가는 데, 너무너무 다 좋았는 데...' 계속 이 말만 되뇌었다. 한 입 먹고 추억을 나누고, 한 입 먹고 아쉬움을 삼켰다. 마지막을 앞둔 그날은 유독 감성적이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냥 걸었다. 마지막의 풍경을, 햇살을 모두 눈으로 담아댔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왕징 SOHO 건축물 앞 계단에 앉아 차분하게 도심의 야경을 감상했다. 직장인들의 야근이 야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경을 앞에 두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중에 취업하고, 돈 많이 벌면 꼭 다시 오자."
8년 전의 우리는 후회 없는 유학생활을 했고, 여행을 마친 뒤 마지막 일주일은 북경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마지막을 왕징에서 보냈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고소득 직장인이 되었고, 그 약속의 배경지인 왕징을 다시 찾았다. 계획은 딱히 없었다. 일단 그냥 택시에서 내렸다.
날씨가 덥고 지쳐서 의식의 흐름대로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예전에 마사지를 받을 때는 비용이 신경 쓰였었는 데, 지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예약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바로 들어갔고, 우리는 한 시간 반 코스를 선택했다. 밖은 무더웠는 데, 에어컨은 16도에 맞춰져 있었다. 시원한데 족욕하는 발은 따뜻한, 이 느낌이 참 좋았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조용히 힐링했다. 발 마사지가 특히 시원해서 참 좋았다. 시간만 더 여유가 있으면, 한 번 더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나마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개운한 상태로 나와서 그런지, 햇살도 딱 기분 좋게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로 왕징에 위치한 '팝마트' 본사로 향했다. 이왕 온 김에 본사 구경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왕징은 회사가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해서 학생 때 이곳에 와서 직장인의 미래를 꿈꾸곤 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랐던, 그때의 막연함이 현실이 되어, 우리는 여기 다시 있다.
빌딩 숲에 온 듯 마천루 같은 회사들이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퇴근하는 현지 직장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이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우리도 이런 곳에서 일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걸음걸음 따라다녔다. 조금씩 노을이 지면서 마음도 괜스레 몽글해졌다.
팝마트 본사가 위치한 포스코 건물에 도착했다. 본사 탐방은 할 수 없지만 1층에 위치한 팝마트 매장을 구경하기 위해 들어갔다. '라부부'가 뭐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지만, 이미 와버렸다.
창업자 '왕닝'은 대학 졸업 후, 베이징에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차렸다. 그 후에는 장난감 특히 블라인드 박스에 담긴 피규어 판매에 집중하면서, 사업이 조금씩 성장했다. 홍콩 디자이너와 협업해 자체 캐릭터들을 계속 출시하면서 IP지식기반 사업 모델을 구축했다.
"We originally hoped to become China’s Disney; now we hope to become a global POP MART." 왕닝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중국의 디즈니가 되고 싶었던 팝마트는 실제 현재 전 세계에서 흥행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마케팅 전략(블라인드 박스, 시크릿 한정판, 옴니채널 운영, 팬덤 구축)이 주요했다고 생각하는 데, 창업자는 이렇게 인터뷰했다. “Whether it’s disappointment, surprise, or regret, it all contributes to the emotional value." 직역하면 "박스를 뜯어보고, 실망이든, 놀라움이든, 후회이든 그 모든 것들은 감정의 가치가 된다."
팝마트의 마케팅은 소비자에게 통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경험'을 제공하고, 감정을 자극한다. 장난감이 주는 효용 그 이상의 도파민을 주고, 가치를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무료한 일상에 자극이 되는 한낱 유행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흥행은 흥행이었다. 그 흥행의 시기에 나 또한 소비의 즐거움을 느꼈다.
팝마트 본사에 위치한 매장에서도 인형 굿즈는 구매할 수 없었다. 희소성이 이렇게나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구나 싶으면서도 구경하러 온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브랜드 캐릭터들 히스토리도 보고, 초기 라부부가 여자 캐릭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크게 구경할 건 없지만, 경험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매장 밖 1층 로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현지 직장인들, 주재원분들이 보였다. 사원증을 찍어야 출입할 수 있는 그 공간 너머가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가 돼서 건물 내부 회사 구경도 해보면 좋겠지만 기적을 바랄 정도의 욕망은 아니었다. 그리고 로비의 간판 앞에 섰다.
이 건물에 상주하는 수많은 회사와 계열사들, 눈으로나마 구경했다. 팝마트 본사는 36층에 있었고 층층마다 사무실이 보였다. 포스코, 우리은행, 코트라 등 국내 기업도 보였다. 교환학생 시절, 왕징에 오면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이상'을 품었다면,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참 묘했다. 지금은 현실에 두 발을 내딛고 서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어떤 일을 어디서 하게 될지 몰랐었다. 지금의 우리는 여전히 이런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그 감정이 그걸로 끝이었다. 그 감정이 더 나아가서 생각으로, 상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뜻밖에도 이곳 로비에서 과거와 달라진 나의 모습을 마주했다. 무엇이든 다 잘될 것 같던 과거의 예비 취준생은 해외 주재원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현실을 잘 아는 직장인이 되었다. 회사 생활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대를 쉽게 품어버리면 실망이 크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그렇게 그런 직장인이 되어서, 이곳 로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느낌이 참 묘하게 다가왔다.
어둑해진 빌딩 숲을 벗어나 다음 장소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왕징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 이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약속의 장소에 돌아왔고, 그때와 달라진 지금의 모습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에는, 여행에는 정답이 없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