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게슬기롭다 Feb 01. 2024

끄읕-맺음 2

가짜 성장 일지 #13

그 힘이 강력했다. 충분히 1~2시간 산책하며 나만의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추운 겨울이지만 걸으면 더울 테니 바지는 따뜻하고 두껍게, 위에는 얇은 옷들을 몇 벌 겹쳐 입었다. 가야 하는 이유도 두 가지나 찾아냈다. 하나는 회사에서 받은 상품권을 사용하기 위해, 또 하나는 '옷에 달려있는 자석 태그'를 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준비물까지 챙기니, 몸과 마음이 모두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거의 달리다시피 걸었다. 이어폰은 마침 내가 좋아했던 노래가 나오고, 나는 몇 가지를 끝냈고, 앞으로 더 끝내러 가는 길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문득 회사 동료 중 한 명의 취미생활이 'todo list에 목록 쓰고 지우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가 왜 '할 일 지우기'를 취미생활로 삼았는지도 충분히 공감이 갔다.


그렇게 한 시간을 걷고, 마트에 도착해 상품권으로 살 과일과 고기를 골랐다. 삼겹살과 샌드위치, 시금치와 당근을 집었다. 계산이 다 끝나자, 주머니에서 옷을 꺼내 그 태그도 떼었다. 그 순간 또 깨달았다. 세상에나, 또 무언갈 했잖아? 또 끝을 맺었잖아?! 너무 즐겁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와 몇 시간을 더 집중해서 하나의 todo list를 끝냈다. 읽어야 할 책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다음에 되돌아와 다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엔 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1시간 30분이면 끝날 거라고 상상했던 그 일이 3시간이 넘어가자, 스스로를 생각하는 메타인지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도, 그걸 알아버린 게 무언가! 내가 뭘 끝냈으니 그 끝난 시점을 알게 된 게 아닌가! 또다시 행복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그 힘 그대로 그다음 날까지 보냈다. 해야 하는 공부를 꼼꼼히 찾아보면서 익혔다. 끝을 내기 싫어서 잠깐 쉬고 싶을 땐, 가만히 나를 진정시키고 리스트를 훑었다. 이미 한 것들을 북북 그어놓은 것들을 보며, 남은 것을 얼른 긋고 싶단 생각을 간절히 했다.


이렇게 끝을 맺다 보면, 나 혼자서 해야 하는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도 모두 잘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서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수준까지 가서 어떤 끝을 내야 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전 12화 끄-읕 맺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