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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Jun 01. 2024

바선생님 방문기

넷플릭스 <더에이트쇼>를 보고 있었는데 말이죠,

해야 할 일은 잔뜩인데, 급한 걸 처리하니 갑자기 모든 것이 하기 싫어졌다. 잠들면 될 것을 그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 짧게 본 더에이트쇼를 마저 보고 싶었다. 1화를 틀었는데, 결론이 궁금해졌다. ‘급한 일 처리 뇌 모드’가 아직 꺼지지 않았던 것일 테지. 1화 속 주인공이 어떤 ‘공간’에 들어간 것을 본 뒤, 영상을 멈췄다. 그리고 마지막화를 재생했다. 오프닝 영상도 스킵하고, 재생 바를 손가락을 쭈욱 당겨 중간으로 가져왔다. 2~7화 사이의 서사는 몰라도 상관없었다. 결말.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 괜찮아? 이런 것들만 머릿속에 질문 리스트로 품고 있었다.


8화는 과거와 현재 편집이 크로스 되는 형태였다. 등장인물의 현재를 보여주는 경우엔 와이드 스크린으로, 그리고 과거를 보여주는 경우는 톤다운되고 해상도도 낮출 뿐 아니라 영상 사이즈도 조절했다. 흥미로웠던 건, 4:3 TV비율이 아니라 1:1 사이즈였다는 것. 사실은 과거라기보다, 인스타그램을 상상시키는 효과가 조금 더 있었다. 낯섦과 편안함이 조금씩 반복되는 느낌. 그 영상 속 등장인물들의 과거는 참 묘한걸? 현재 갇혀있는 상태도 묘하지만 과거도 조금씩 더 극화되어 있군... 감독도 주인공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시점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네.... 그렇게 점점 몰입이 되며 8화를 스킵하지 않으며 보기 시작하던 때….


스스슥 - 턱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턱,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11시 방향엔 내 엄지손가락보단 길이가 짧지만 그만큼 통통한 벌레가 있었다. 처음엔 저게 뭔가 싶었다. 큰 날개를 가졌었고, 내 방 창문을 통해 날아와 벽에 붙을 정도의 곤충은 무엇인가 싶었다. 알 길이 없었다. 보통 ‘날아다니는 게 익숙한’ 곤충들을 후후 불면 다시 날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존재는 그렇지 않았다. 후후 불었더니 툭하고 떨어졌다.


욕이 나왔다. 그리고 직감했다.

바선생이다. 


처음에 떨어진 곳을 툭툭 두드렸지만 움직이는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쪽에 있던 모든 짐을 바깥으로 꺼내고 한참을 청소기로 쑤셔대고 나니 그제서야 무언가가 빠르게 걸어 나왔다. 수십개의 발로 향한 곳은 침대쪽이었다. 너무 끔찍했다. 믿을 수 없었다. 더 에이트쇼보다 차원이 훨씬 낮은 징그러움이지만 내겐 아니었다. 소리도 안 나왔다. 여기서 저것을 잡지 못하면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바선생을 잡을 때까지 내겐  (8화에 등장인물이 당하던 것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나지만) '수면통제' 의 상태로 강제 진입했다.


잡고 있던 청소기의 헤드를 분리하고, 출력을 최대한으로 켰다. 바선생의 경로를 찾아냈다. 그는 푸드덕 거리는 소리도 내지않았다. 찹찹거리는 소리라도 나야 위치를 알텐데, 그는 무소음에 가까웠다. 등짝의 날개를 사용할 낌새는 없었다. 와다다 와다다 거리며 나의 책과 책 사이를 움직였다. 으악. 어디에 숨어 보이지 않게 되자 두배로 무서워졌다. 그가 숨었다니! 절망스러운 마음에 그 주변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옮겼다. 의자위로, 탁자위로 올려두었다. 시야를 조금 정리하니 그가 보였다. 그는 또 자신의 몸을 책 옆으로 숨기려했다. 왼쪽으로 청소기 헤드를 움직이니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또 왼쪽으로 와다다. 이럴 순 없었다. 손에 잡고 있던 청소기를 ‘터보’ 모드로 두었다. 그 상태로 바선생을 향해 청소기질을 했다.


하지만 그가 좀더 빨랐다. 그가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위치할 공간은 둘 뿐이라는걸 알았다. 내 시야 바깥으로 도망갔거나, 청소기 속에 빨려들어갔을 것.  꽤나 덩치가 있는 바선생이었기에 바로 청소기 먼지함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통로 속 낑겨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청소기를 끌 수 없었다. 전원을 멈추는 순간 통로에 매달려있던 바선생이 다시 탈출할게 아닌가.


터보 모드를 끄지 못한 채로 계속 바선생을 찾아다녔다. 온갖 짐들을 마구 움직이며 찾던 때, 청소기 먼지함 속에 (드디어) 도착한 바선생이 눈에 보였다. 어찌어찌 포획(?)을 한 청소기를 처리하는 것이 마지막 일이었다. 청소기에서 꺼내 이 존재를 죽일 것인가. 아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바깥으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자연을 향해 청소기 먼지함을 열었다. 가장 먼저 바선생이 떨어졌고 그는 재빨리 자기의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도망갔다. 그가 도망간 것이었지만, 사실 내가 그로부터 도망간 것이었다.


바선생과의 조우 이후, 더 에이트쇼는 조금 순한 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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