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작년 늦가을 급성심근경색 판정을 받고 일곱 시간의 대수술을 했다. 의사는 남편의 심장이 거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아 조형술 시술에 실패하였고, 세로로 가슴뼈를 자르고 갈비뼈를 들어 올려 막힌 심장의 대동맥을 다른 혈관으로 이어 붙여야 한다는 말을 너무나 담담하게 하였다.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허허 웃으며 수술실에 들어갔고, 같은 시간에 남편처럼 웃으며 수술실에 들어간 아저씨의 가족과 함께 수술실 앞을 지켰다. 수술하는 일곱 시간, 그 참기 어려운 시간에 그 가족과 나는 어느새 많은 이야기를 나눈 동지가 되었다. 아저씨는 선천적으로 심장판막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번에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수술해도 된다는 데 그냥 이번에 해버리고 편하게 놀면서 사시겠다고 수술을 결정하셨다고 했다. 누가 먼저 나올까의 내기에 내가 결국 이겼고, 그 가족과 나는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남편은 강한 의지로 의식에서 잘 깨어났고, 재활도 성실하게 했다. 현재는 예전처럼 회사도 잘 다니고 있다. 수술실 앞에서 보았던 그 광경. 길에서 쓰러지며 허리까지 다쳐 구급차에 실려왔던 아저씨. 그분 가슴 위에서 급박하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의사와 달려가는 침대를 울먹이며 따라가던 딸들. 남편도 그분처럼 길에서 쓰러질 수도 있었다.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수술실 앞을 함께 지키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심장 관련 네이버 카페에서 우연히 나를 찾았단다.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이내 내 마음은 깊은 곳으로 끝도 없이 추락했다. 내 남편처럼 웃으며 수술실을 들어가신 아저씨가 중환자실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많은 고생을 하시다 끝내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무서웠다. 두 수술실의 환자 중 내 남편이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담담하게 수술을 이야기했던 의사 말처럼 남편은 수술이 잘 되었어도 언제든 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심장은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던 지인의 말은 못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다.
내가 요즘 하는 모든 생각에는 '죽음'이 함께 한다. 남편의 '죽음'이 될 수도 있고, 물론 나의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셔 병원에 갔더니 2주 후 돌아가신다고 했다며 친구가 울었다. 아버지는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우셨다고 했다. 나는 2주 후는 무슨 말도 안 된다고 아닐 거라고 친구를 위로했다. 하지만 정확히 2주 후 친구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2주 후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나는 그 2주를 어떻게 살게 될까. 내가 죽는 줄도 모르는 채 갑자기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까.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 울기만 하다 죽게 될까.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다. 아마 서류정리만 하다 2주가 끝나지 않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자꾸 정리가 하고 싶다. 지인이 죽고 그 이름이 한동안 카톡친구목록에 있었다. 볼 때마다 가슴 아프던 그 이름은 어느새 사라졌다. 내가 죽으면 온라인에 남아있는 내 흔적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소유욕이 넘치던 나의 물건들을 처리하느라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힘들 것 같기도 하다. 반대로 남편은 가진 물건이 많이 없다. 현명하기도 하지.
남편에게 물었다. "만약 오빠가 죽으면 연락처에 있는 모두에게 연락하면 되는 거야?" 나는 남편이 갑자기 죽는다면 누구에게 연락해야 좋을지를 모른다. 그래서인가. 문자 중에는 뜬금없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고문자가 오는 경우가 있다. 정신없는 내 핸드폰 연락처를 보면 남편은 정말 당황할 테다. 연락처를 정리하기로 하고, 대화는 영정사진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니, 평소에 내 사진 좀 잘 찍어주라. 오빠 핸드폰에 내 얼굴 멀쩡하게 나온 사진이 하나도 없을걸?" 연애할 때는 그렇게 내 사진을 찍더니 요즘엔 사진 찍어준다고 폰을 들이민 적이 거의 없다. "아하하. 이거 봐봐. 이거. 진짜 못생겼다. 이 사진으로 할까? 어때? 재밌고 좋잖아" 남편은 나와 아이들이 누가 웃기는 표정인지 내기하듯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어떤 게 영정사진으로 좋을지 한참을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우리가 꽤 나이 들었음이 실감되었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 삼십 대 초 근육 빵빵 뽀송할 때 만나 어느덧 흰 코털까지 보여주는 남편은 와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네 한다.
우리는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았을까.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우리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두렵게 느껴지는 걸까. 우리는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서 그렇게 다들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사는 것이겠지.
죽음을 생각하면 일상에 감사함이 생긴다. 어이없는 일에 세상이 재밌게 보이기도 한다. 욕심을 덜 부리게 되기도 한다. 나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기로 한다. 죽기 직전에 당황하지 않게 말이다.
내가 떠나면 나의 흔적이 어떻게든 남겠지. 이곳저곳에 아주 작고 희미하게 말이야. 이왕이면 작은 햇살들이면 좋겠다. 세상아 따뜻해져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