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BTI J 유형이 절대 아니다. J들을 당황시키는 P 유형이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계획 세우기를 거부한다. 어차피 그 계획은 어그러질테니. 완벽한 계획도 나의 변덕 앞에선 어쩔 수가 없다. 본인은 J 유형이라고 우기는 남편도 점점 P 화 되어간다. 가을의 마지막. 게으름은 우리 가족 나들이 목적지를 춘천에서 강화로 순식간에 바꾸었다.
"엄마, 저기 우리 살던 시흥 집이 보인다. 저기 저기 초등학교랑 우리가 갔던 쿠우쿠우"
도로 옆을 반대로 스치듯 지나가는 단지를 보며 아이가 말한다.
"예전에 너희 태어나기 전에 아빠랑 둘이 여기 지나가면 와, 이런 데다 아파트를 짓네 했었는데.. 벌써 다 짓고, 우리가 저기 몇 년 살고, 그리고 지금 우리 집으로 이사 온 지 벌써 이년이 됐어. 참 세월 빠르다. 인생무상이야. "
이 도로를 지나면서 남편과 이런 허허벌판 뻘에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대화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언제 우리 아이들이 뿅 하고 태어나 자랐나, 수많은 일들과 애씀 들을 그래프의 작은 점들로 만들어버리는 세월이 덧없게 느껴졌다.
"엄마, 인생무상이 무슨 뜻이야? 사람인, 날 생, 없을 무, 상은 무슨 상이지?"
사자성어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아는 한자를 머릿속에서 죄다 끄집어낸다. 지루한 고속도로, 시간은 많았다.
윗上? 사람이 태어나서 위가 없다?
생각想? 사람이 태어나서 생각이 없다?
서로相? 사람이 태어나서 서로가 없다?
상賞? 사람이 태어나서 상을 못 받는다?
서로 하나씩 말하며 말이 안 되는 뜻에 깔깔대고 웃다가 한자 사전을 찾아보고, '항상 상. 사람이 태어나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인생이 덧없다' 라는 말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그때부터 사자성어 말하기 게임을 하자고 했다.
살생유택, 사친이효, 사군이충, 임전무퇴, 사면초가..
한 명씩 돌아가며 말하다 나온 사면초가가 무슨 뜻이냐고 또 물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뜻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뜻으로,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희망이 없는 상태"
유래
항우가 해하에서 한군에 포위되었는데, 초나라군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쉽게 기세가 꺾이지 않자, 어느 날 한군이 초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울려 퍼지게 했다.
[나무위키]
사면초가의 유래를 알게 된 아이들은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노래로 우리나라에는 아리랑이 있다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그러다, 신이 났는지 둘다 붕대 감은 손가락을 들고 안중근의 단지 동맹을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삼국지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 이야기를 하다 인터넷에서 강화도에 있는 삼국지 도원결의 카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여기 갈래?"
열 살인 1호는 돌멩이와 칼에 로망이 있었다. 칼만 보이면 사달라고 안 쓰던 떼를 쓰곤 했는데 카페 사진에서 보이는 다양한 칼에 눈이 동그래진 아이는 궁둥이가 들썩들썩했다.
카페는 중국 박물관의 물건들을 들여온 듯 다양한 것들이 많았고, 특히 삼국지 인물들에 관련한 것들이 많았다. 그 시대 옷도 입어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고, 사진에서 본 칼과 무기들도 많았다. 2층에선 삼국지 보드게임도 준비되어 있었고, 삼국지 어린이 책도 읽어볼 수 있었다. 삼국지 색칠놀이까지 즐기며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열 살 남자아이들에겐 정말 딱 맞춤인 카페였다.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오자."
혹시 모른다며 가져온 용돈으로 그럴듯한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조조 블록을 구입한 1호, 2호는 그 어느 멋진 장소보다 이곳이 좋은 듯 말했다.
우연히 발견한 것 치곤 꽤 괜찮은 나들이였다. 나에겐 삼국지 책을 읽히겠다는 빅 픽처도 있었으니.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이곳으로 데려다준 게 아닐까. P 유형도 알고 보면 계획이 다 있는 걸로. 풋.
글쓰기 주제가 '우연'인데 우연히 카페를 가게 된 이야기를 써야겠다니 2호는 신기해 하면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