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Dec 16. 2023

새로운 시작

소피의 카우치에 초대합니다 Part.2

https://brunch.co.kr/@sophy100/174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피는 인사를 한 후로 앨리스와 쥰이 말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중재자가 아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안내할 뿐. 앨리스와 쥰은 잘 모르겠지만 소피가 보기에 이 둘은 너무나 잘 해오고 있었다. 너무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여려서 상처받기 쉬운 영혼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앨리스와 쥰을 보며 소피도 구원받는 중이었다.   

   

“소피, 처음에 앨리스가 저를 도울 수 있다고 했죠? 제 글을 보여주면 되나요?”     


쥰이 처음에 소피가 한 말에 관해 물었다.     


“쥰이 원한다면요.”     


 소피는 언제나처럼 강요하지 않았다. 앨리스가 의문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쥰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말없이 앨리스에게 내밀었다. 앨리스도 말없이 노트를 건네받고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몇 장의 노트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끝까지 읽지 않고 앨리스가 노트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재밌는데요?”     


쥰은 앨리스의 말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 짓고 있었다.      


“정말요? 앨리스. 제가 쓴 글이 제대로 보여요?”     


“그럼요! 저는 솔직해지기로 했지 빈말은 못 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데 읽으면서 내내 생각이 났어요. 어떤 이야기인지 끝까지 보고 싶네요.”     


“소피. 제가, 제가…. 저는… 난독증이 나은 걸 까요?”     


쥰은 앨리스의 말에 감격이 차올랐다. 섣부른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아서 소피에게 확인이 필요했다.      


“쥰. 글쓰기 전에 뭐 했어요? 주문 외우기?”     


“네, 맞아요! 용기가 필요해서 주문을 외웠어요.”     


소피의 질문에 답하며 앨리스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앨리스는 내심 쥰이 부러웠다. 시기 질투가 아니라 순수한 선망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쥰은 아직 20대인데 어린아이의 감성이 놀랍도록 살아있었다.      


“쥰. 전에 만났을 때 내가 물었던 말 기억나요? 내가 비정상으로 보이냐는 말.”     


“네. 기억나요. 사실 제가 늘 하던 말이었는데 앨리스에게 들어서 놀랐어요.”     


“어쩐지. 그냥 하는 대답 같지 않았어요. 고마워요. 쥰 덕분에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쥰이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줄게요. 쥰은 비정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비정상이라면 갖고 싶은걸요?”     

소피는 앨리스가 쥰을 만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농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질 줄은 몰랐다. 자신만의 어둠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앨리스의 모습은 나이와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찬 병아리 같았다. 인간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자, 이제 그럼 우리 모두 첫 시간에 했던 질문 내가 비정상인가에 대한 고민은 더는 필요 없죠? 지금도 ~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요? 아님 ~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한가요?”      


소피가 앨리스와 쥰을 차례로 쳐다보며 물었다. 먼저 쥰이 입을 열었다.      


전, 제가 비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 보이든 저를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난독증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보다 지금은 언제나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1호 독자를 찾아 헤맸는데 제가 될래요. 자신의 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가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혹시 제가 1호 독자를 해도 될까요? 아님 2호라도 좋아요.”     


쥰의 말에 앨리스가 물었다. 쥰은 앨리스가 처음에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앨리스가 황급히 말했다.      


“절대로 호의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는 직업이 사서에요. 그동안 수많은 책을 다루고 읽었지만, 쥰의 책은 아직 세상에 없잖아요? 언젠가 전국의 도서관에 쥰의 책이 진열되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앨리스의 말에 소피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쥰을 쳐다보며 말했다.     

 

“쥰. 정말 멋진 일이 뭔지 알아요?
이게 다 쥰이 스스로 만든 일이라는 거에요!
누가 도와준 게 아니라.”    

 

“아, 아니에요! 소피가 아니었다면, 앨리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쓸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앨리스와 소피의 이어지는 칭찬에 쥰은 너무 생소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런 쥰의 모습을 귀여운 여동생 보듯 쳐다보던 앨리스가 말했다.     

 

“저는 죄책감이 사라지면 좀 뻔뻔해질 줄 알았는데 완전히 저를 바꾸지는 못하겠어요.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억지로 강박을 가지지는 않을래요.”     


“잘 생각했어요. 어떤 식이든 앨리스가 행복해지면 돼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도 될까요?
외로운 건 싫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앨리스는 순간 과거가 떠올라 아랫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자신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은 아무리 해도 단련될 것 같지 않았다. 다음에 또 무너지면 그땐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엔 지금이 너무 소중하잖아요? 순간을 좀 더 즐기도록 해봐요. 자신을 위해서.”     


소피는 앨리스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소피도 그런 적이 있으니까. 누구나 예외는 없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자! 우리 모두 억지로 힘낼 필요는 없어요. 힘들 땐 이것 하나만 기억하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마음보다 긍정적인 것부터 생각하기. 어때요?”     


“그럼, 저는 이제부터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제 그림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돕고 싶어요.”     


소피의 질문에 앨리스가 답했다.     


“저도 난독증을 걱정하지 않고 일단 계속 쓸래요. 아직 겁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때라는 건 알아요.”     

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앨리스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났다.      


“아! 지금 쥰의 말을 듣고 갑자기 생각난 건데… 혹시 괜찮다면 쥰의 글에 삽화를 그려보고 싶어요. 아까 잠깐 읽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장면이 있거든요. 부담 주는 건 아니에요. 책이 나오면 그때 그려봐도 되니까…”    

 

“좋아요! 오히려 제가 영광인걸요! 감사합니다.”     


앨리스의 제안에 쥰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글에 그림을 그려준다니 상상만 하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얼른 글을 완성하고 싶었다.      


“와우! 너무 멋진 작업인데요? 결과를 떠나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두 분 다 응원할게요!”     


소피는 쥰과 앨리스에게 과하지 않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소피가 의도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정은 두 사람이 스스로 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 The End.               


이전 09화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