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
X는 집을 나가기 전날에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어.
- 네가 나간다며.
- 그야 홧김에 그런 거지만...
- 너는 자존심 때문에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잖아.
-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받아줄 거야? 그럼 얼마든지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어. 근데 아니잖아.
용서를 담보로 한 사과,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를 향한 것이 아닌 사람과 미래는 없었다.
한때는 그에게 사과를 '요구'한 적도 있었다.
- 미안하다고 말해.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하란 말이야.
- 미안해.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하는 그가 내뱉는 미안하다는 말속엔 진정성이 없었다. 그저 상황을 면피하기 위한 헛소리일 뿐.
- 그만하자.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요구하면 그 말을 따라 하는 역할극 따위로 넘어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중간 과정이 생략된 그와의 이별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나는 "미안해"라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하는 순간, 그다음 책임은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상대방을 용서해 줄 책임을 떠안는다.
물론, 사과를 받아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지만 이미 사과를 받은 이상 상대방에게 더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상처가 얼마나 크고 아프든 간에 미안하다는 말을 한 상대방이 내게 더 해 줄 일은 없다.
바로 그 지점이 화가 난다. 미안하다는 알량한 말 따위로 넘어가려는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옹졸한 인간이 된다. 관계가 악화하는 것에 내 책임의 지분이 커진다. 피해를 입은 건 나인데.
피해 의식을 가지는 것이 싫어서 쿨하게 용서하려고도 해 봤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과거를 붙잡고 있어 봤자 나만 손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상대방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부터 잊어버린다. 이미 털어낸 과거가 된다. 나는 그가 털어낸 과거의 잔재까지 끌어안고 현재를 고통받는다.
공룡이는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했다. 적어도 그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부분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걸 안 이후로 그 말을 아낀다. 나에게 두 번 상처 주는 걸 알아서인지 아님, 더 큰 화를 부른다는 걸 알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정작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은 그 말을 잘하지 않는다. 입버릇처럼 미안하다고 말하고 뒤돌아서서 같은 짓을 반복하는 인간보다 더 뻔뻔한 유형이다.
아버지는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울 때도, 대학생인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 때도, 대출금을 갚지 않아 집이 경매로 넘어갈 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구도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자기 자신에게 제일 미안해했다. 잘 살아보려고 한 건데 세상이 날 힘들게 하니 자기 연민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나이를 먹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아낀다. 내가 정말로 그 말을 해야 할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장 미안해야 할 자신에게 엄격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상처를 보듬어 안느니 차라리 더 상처 주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하는 말도 거부했다.
미안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