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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wol Feb 03. 2024

꼬닥꼬닥 걸으멍*

04. 산책





이번 챕터의 주제인 <산책>에 대해 작성하고 있는 찰나에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핑계고>의 ‘이달의 계원~이동휘배우의 산책의 효능'편이 눈에 들어왔다. 이동휘 배우가 애정하는 산책 코스를 걸으면서 산책의 효능을 대략 스무 가지 정도 촤라락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는데, 반 정도는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효능이고, 반은 이번 생에는(어쩌면 다음 생에서도) 내가 절대 느낄 수 없는 슈퍼스타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이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산책의 효능이란, 

1. 잡념을 떨칠 수 있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2. 한 시간 걸으면 약 밥 한 공기 칼로리를 소모한다

3. 하늘, 숲, 건물을 보면 부정적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4. 계획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5. 나만의 코스를 개척해 모험심을 기를 수 있다


그가 산책을 시작한 계기는 배우로 잘되지 않은 시기에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산책하면서 잘 풀리지 않았던 시절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추스르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산책의 사전적인 의미는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 의미를 정확히 알기 전부터 나는 곧잘 걸었다. 학창 시절에는 대부분 집과 멀었던 학교까지 부단히 걸어서 등하교했고, 여행을 가서는 거리를 익히고 둘러보면서 관광을 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도보 가능한 거리는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듯 걷기 또한 필수 코스였다


산책을 의식하게 된 것은 제주 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제주에서 집을 구할 때 산책 코스까지 고려할 정도로 내일상에 산책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걸으면서 건강해진다는 보편적인 의미를 넘어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조선시대 만들어진 정자가 있다.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신 임금을 사모한다는 충정의 뜻을 가진 곳이다. 유배를 온 것도 아니고 임금을 사모하는 충정의 마음도 없지만, 때때로 녹록지 않은 제주살이가 그 시절 그들의 감정과 조금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을 옮기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다 보면 옆으로 너른 바다에서 격한 파도가 철썩철썩 치기도 하고 잔잔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하하 호호 일몰을 보러 온 관광객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주인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와 신이 난 강아지들을 밝은 모습을 마주치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하고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는 시간과 코스를 정해두지 않고 내 앞에 이어진 그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 보면 익숙한 길이 나오기도 하고, 때때로 막다른 골목이 나와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뿐해진 심신과 산뜻한 기분만이 남는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딛는 걸음마다 하나씩 내려놓은 듯. 이동휘 배우는 그렇게 시작한 산책을 일주일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에서 자연스럽게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 행위가 되었다


바다 코스와 동산 코스(바닷길이 아닌 그 윗길로 지대가 높아 한라산이 내려다보이고 날씨에 따라 노을이 멋진 날의 또 다른 산책 코스)로 나눠 그날 기분에 따라 발길을 옮기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나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집을 나선다. 랜덤으로 좋아하는 음악이 이어폰을 통해 들려올 때면 콧노래를 곁들여 더 경쾌하게 다리를 움직인다


때때로 함께 걷기도 한다. 지인이 제주를 찾는 날이면 렌터카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가도 꼭 시간을 내어 지인 코스로 산책을 나선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이 코스는 제주를 찾는 지인은 꼭 한 번 데려가거나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코스다. 얼마 전에 방영한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소개되어 이제는 제법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지만, 촬영지였던 곳만 딱 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만 더 천천히 둘러보고 가세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을 오르면 그 정상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맑은 날에는 저 멀리 우도까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일출봉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나를 비춘다’는 의미의 지명까지 마음에 쏙 든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풍경도 모두가 알만한 관광지도 없지만 바다와 성산일출봉,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로운 산책을 할 수가 있다


혼자서도 좋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근황도 나누고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가면서 산책하다 보면 다시 한번 산책이라는 것이 참 멋진 행위구나! 느끼게 된다. 슈퍼스타만이 느낄 수 있는 산책 효능(예를 들면, 길거리 팬미팅을 할 수 있다. 와 같은)은 절대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괜찮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릴 수도 있고 운동으로서 칼로리를 소모하며 건강해질 수도 있으며 모험심을 기르고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각자 무엇을 얻든 그것은 꽤 괜찮은 것일 테니




* 꼬닥꼬닥 걸으멍 : ‘천천히 걸으며’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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