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산책
0. 들어가며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체력이. 야트막한 고갯길도 숨이 되게 쉬어지고, 환경 보호와 건강 증진 두 마리 토끼를 잡겠노라 계단을 이용하면 금세 고비를 맞았다. 하! 보잘것없는 체력이여. 아! 비루한 몸뚱이여. 이번 챕터 주제 <산책>.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난 걷는 게 너무 좋아,라고 나발 불던 스스로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몸소 체득한 후 몇 번 낙담하고 몇 번 부상을 거친 다음 진정한 산책러가 된 다소 극적으로 포장하고 싶었지만 지극히 편편한 하지만 산책에 관한 한 열성적인 별의별 소리를 담는다
1. 마구마구 엉망진창으로 걷는 나
일단은 ‘오래’ 걷고 싶었다. 걷는 게 좋아, 걷는 거 좋아 노래 부르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걷는 게 싫다는 말이 아니라 걸을 수 없었다. 걷는 시간이 내 기준 초과되면 우선 허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묵직한 통증에 짓눌려 말 그대로 허리를 짚고 걸어야 했다. 나는 걷는 게 좋은데, 왜 걷는 게 힘들까? 왜 허리가 아픈 거야? 실제로고통이 어마어마했다. 걸을 때마다 허리가 아픈 건 짜증을 동반했다. 허리가 문제인지, 다리가 문제인지, 아니면 둘 다 문제인 건지 내 몸에 화가 났다.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걸었다. 마구마구. 엉망진창으로(대체 왜 그랬나요 휴먼)
2. 문제? 없지 않고 제법 많았다
유튜브에 ‘바르게 걷는 방법’을 써넣자 다양한 솔루션 영상이 와르르 쏟아졌다. 한꺼번에 엄청난, 다양한 해결법이 밀려 들어오자 혼란스러웠다. A 영상에서 설명한 방법이 B 영상에선 지양되고 있었고 C 영상은 다시 A 영상의 방법과 비슷한 솔루션을 설파하고 있었다. 몇십 개의 영상을 본 후 공통된 솔루션 몇 개를 취합해 내 몸에 시험해 봤다. 당장에 어색했다. 머리와 척추의 정렬, 가슴과 등의 이완과 수축, 팔의 각도, 손의 모양, 골반의 정렬, 다리의 각도, 발바닥에 적절하게 배분된 힘의 분배 등 내가 모르던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솔직히 충격받았다. 나... 이렇게나 마구마구 걸었던 거야? 이게 참트루였다니!
3. 일단 있는 장비로? 어림도 없지! 장비빨 제대로 모시겠읍니다
나는 장비빨에 양단이 있다면 부정적인 사람에 가까웠다. 장비는 핑계고, 그냥 물욕 아닌가? 운동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양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속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땀나는데 땀복이 왜 필요해? 네. 맞습니다. 상기 기술한 장비 모두 구입한 사람. 여기 있습니다. 학습한 내용에 의하면 바른 걷기를 지속하려면 운동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컨버스로도 걷는 데 문제없다! 며 무언가에 특화된 운동화, 등산화, 러닝화, 트레이닝화 등 모든 -화에 대해 나 홀로 쇄국정책을 설파하는 흥선대원군과 같았는데 이건 내가 걷는 일에 둔 패착이었다. 잘 걸으려면, 좋은 운동화가 진짜로 필요했다. 어떻게 단언하냐고? 컨버스로 한강을 3KM만 걸어도 다섯 번째 발가락이 네 번째 발가락 위로 올라타려고 한다거나 발목이 퉁퉁 부어 양말 자국이 다음날에도 남아 있던 불상사가 러닝화 구입으로 상쾌하게 해결됐다.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또 뭘 사볼까. 걷는 게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항상 노래하던 대로 걷는 게 진짜로 즐거워졌다
4. (나름) 혹독한 전지훈련
의외로 서울에서 산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건물이 많고, 건물이 많기에 사람이 많고, 차도 많고, 횡단보도도 많았다. 부러 한강을 나갈 수도 있지만 한강까지 굳이 안 가도 무작정 산책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쉽지 않았다.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걷고 싶은 데 마땅한 곳이 영 안보였다. 산책을 잘하고 싶어 조깅 훈련을 해야겠다 싶던 차 검색창에 ‘동네+조깅’을 조합해 검색하니 몇 군데가 나왔다. 처음 간 곳은 나무가 많아 좋았지만 언덕도 많았다. 구불구불 경사진 길이 재밌기도 했지만 의외로 바른 자세로 걷기가 힘들었다. 지면의 단차가 심해 코어에 긴장을 늦추면 허리가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아 무서웠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오전에만 개방하는 운동장이었는데 짱 좋았다. 짱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사계절 내내 특수한 상황을 빼놓고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개방했고 러닝 트랙이 있었다. 몇 번 망설이다 냅다 나가봤더니 사람들이 좀 있었다. 나만 걷고, 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것도 잘 뛰는 사람들이 곁에서 휙휙 지나가니 동기부여가 더 됐다. 멋졌다. 나도 멋져져야지! 멋지게 걸어야지! 세 번째는 오전에만 여는 두 번째 트랙이 아쉬워 찾게 된 곳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 조성된 공원이기에 시간에 구애가 없었다. 다만 트랙의 길이는 두 번째 트랙보다 짧아 아쉽긴 하지만 그건 내가 횟수를 더하면 될 일이었다. 주변에 이렇게 공원이 많고 다양하다니. 산책에 관심을 두기 전에는 영 모르던 공간들이었다
5. 흰 러닝화와 미세먼지 수치 50 이하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나름 나만의 맹훈련을 5개월 정도 지속하니 걸어도 걸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초반에는 무릎이 부어오르고, 발목이 시큰하고, 발가락이 트고 난리가 났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자세도 끊임없이 교정했다. 이 방법도 적용해 보고, 저 방법도 적용해 본 후 내게 제일 잘 맞는 방법을 픽스해 지속했다. 내가 만든 러닝클럽 회칙 3번대로 스포츠양말을 구비했더니 상황은 더 나아졌다. 걷는 게 무섭지 않았다. 시간만 나면 산책하고 싶어졌다. 언덕이 있든, 횡단보도가 있든 더 이상 짜증 나지 않았다. 그저 러닝화와 미세먼지 수치 50 이하면 어디든 걸을 수 있었다. 어디든 걷고 싶어졌다. 신기했다. 말로만 버무렸던 취미이자 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 취미고 특기로 추가되었다. 서울 어디든 두 발로 지면을 착착 밀어 걷다 보면 걱정도 고민도 한결 가벼워졌다. 생각이 많을 때 걷기가 도움이 된다는 건 정말 그랬다. 아무 생각이 안 들어도 산책하고, 생각에 사로 잡혀도 산책한다. 잘 걷기 위해, 잘 자기 위해, 잘 살기 위해 걷는다. 걸어도 걸어도 부족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오버런 하면 잘 걷고, 잘 자고, 잘 사는데 아웃될 수 있으니 언제나 내 몸의 소리를 살필 것. 그러니까 이 장황한 별의별 소리의 결론은 일단 걷다 보면 안다는 말이다. 산책 뭐 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