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니 콩쿠르의 피아노, 에드워드와 헨리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부소니를 기리기 위해 열리는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2021년의 우승자는 한국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단 세 명이 겨루는 최종 결선에 진출했고, 난곡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귀국 후 인터뷰에서, 부소니 콩쿠르 전 과정에서 줄곧 자신의 동반자였던 '에드워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에드워드는 과연 누구일까.
부소니 콩쿠르의 모든 참가자들은 스타인웨이 피아노 두 대 가운데 자신이 선호하는 피아노를 골라 경연에 참가한다. .참가자들은 경연이 시작되기 전에 15분간 콘서트홀에서 이 두 대를 다 쳐보고, 자신이 칠 피아노를 선택한다. 이 피아노에는 이름이 있었다. 한 대는 에드워드, 한 대는 퍼디난드였다.
"조율사 선생님이 모든 피아노에 자식처럼 이름을 붙이셨어요. 에드워드와 퍼디난드, 그렇게 두 대를 '데리고' 오셨어요. 같은 스타인웨이 피아노인데도 에드워드랑 퍼디난드는 정말 달라요. 다른 제조사면 몰라도 같은 제조사이면 같은 재료로 만들었을 텐데, 그런데도 다르거든요. 정말 신기해요."
부소니 콩쿠르에서 피아노는 '그것(it)'이 아니다. 피아노를 일컬을 때는 이름을 부르거나, 인칭 대명사를 써야 했다. 박재홍도 평소 피아노를 그냥 악기로만 보지 않았다고 했다.
"저도 언제나 피아노가 사람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다른 사람들이어서 얼른 친해져야 해요. 승마하는 제 친구 얘기 들으니까, 말을 타는 것하고도 약간 비슷해요. 말을 탈 때도 어떻게 접근해서 빨리 친해지느냐가 정말 중요하대요. 피아노랑 비슷해요. 말 중에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 피아노 중에도 누구나 금방 친해질 수 있지만 엣지(Edge)는 없는 피아노가 있어요. 또 엣지는 있는데 너무너무 예민해서 여지를 잘 안 주는 피아노도 있고요.
에드워드는 '아기 피아노'였어요. 한 세 살 정도 되었죠. 사실 쉽지 않은 피아노였어요. 소리 색깔이 너무 다양했어요. 너무 다양해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정직하게 잘 들린다고 할까요. 퍼디난드는 에드워드보다도 더 어린 피아노였죠. 그런데 저한테는 퍼디난드가 지나치게 혈기왕성한 거예요. 막 '가자! 가자!' 이런 느낌이랄까. 소리가 엄청 크고 빵빵했고, 대신 노련미는 없었어요. 너무 새 피아노라서 소리 컨트롤이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리가 작은 사람들은 퍼디난드가 좋겠다 생각했어요. 저는 그래도 체격이 있고 소리를 크게 잘 내는 편이어서 에드워드를 골랐어요."
한 번 피아노를 고르면 중간에 바꿀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박재홍은 결선까지 쭉 에드워드와 함께 했다. 사실 조율사는 퍼디난드도 쳐보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소리가 쫙쫙 뻗어나가는 퍼디난드가 경연장소에 어울릴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박재홍은 끝까지 에드워드를 고집했다.
"제가 콩쿠르 나갈 때 징크스가 좀 많아요. 바꾸면 안될 것 같더라고요. 나와 행운을 함께 했던 피아노인데 어떻게 배신해요? 어떻게 보면 나한테 행운의 증표 같은 에드워드인데. 그래서 끝까지 에드워드랑 함께 했어요."
부소니 콩쿠르는 대대로 유명한 조율사 가문이면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딜러인 파사도리(Passadori)와 파트너십을 맺어 콩쿠르를 진행한다. 경연 외에 연습 때도 모두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제공하는데, 이 피아노들도 각기 이름이 있었다. 헨리, 비앙카, 레오나르도 등등. '피아노의 여제'로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이 지역에서 공연할 때는 에드워드나 헨리를 꼭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박재홍은 아르헤리치가 즐겨 치는 헨리로 연습하고, 에드워드로 경연에 임한 것이다. 피아노의 이름들은 모두 조율을 담당한 파사도리가 지었다. 박재홍은 콩쿠르를 치르면서 '파사도리 선생님'과 굉장히 친해졌다고 했다.
"파사도리 선생님이 정말 피아노마다 딱 맞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 같아요. 이름에 성격이 나타나거든요. 에드워드, 하면 뭔가 영국 느낌이잖아요. 영국의 옛날 집사, 이런 느낌이면서 소리가 중후하고 부드럽고 매너 있고 교양 있고. 퍼디난드는 젊고 패기 있고 소리가 아주 힘차요. 뭔가 스페인 축구선수 같은 이름이잖아요."
에드워드와 퍼디난드를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는 파사도리 조율사에게는 '좋은 연주'의 기준이 명확했다. 바로 '내 피아노를 행복하게 해주는 연주가 좋은 연주'라는 것이다. 박재홍이 연주를 다 마치고 내려오자 그는 재홍을 꽉 끌어안고 행복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재홍! 나는 에드워드가 이런 소리도 낼 수 있다는 걸 몰랐어. 나도 몰랐던 내 피아노 소리를 알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피아노가 너무 행복해 보였어!"
그는 박재홍의 우승 소식에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다고 한다. 박재홍은 파사도리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관점에서 연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연주 끝나고 과연 이 피아노가 나를 좋아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진 않잖아요. 언제나 연주를 관객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런 생각만 했죠. 그런데 파사도리 선생님 관점도 참 새롭고 좋은 관점이고, 피아노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저도 피아노와 친구하기, 이런 프로젝트를 해보려고 해요."
박재홍은 부소니 콩쿠르를 치르면서, 피아노를 대하는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콩쿠르가 열린 볼차노를 떠날때 마치 평생의 친구와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우승의 동반자였던 에드워드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파사도리 선생님은 언제든지 친구 만나러 이탈리아에 놀러오라고 했다. 박재홍은 마침 이탈리아 연주 일정이 새로 생겨서, 다시 친구를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피아노에도 이름을 붙여줄 생각이다. 한국어 이름으로 할까, 중성적인 이름으로 할까,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다.
박재홍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피아노에도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피아노는 한동안 치지 않고 있을 때에는 옷걸이가 되기도 하고, 이리저리 책을 쌓아놓는 선반이 되기도 했다.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악보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피아노에 예쁜 이름 붙여주고, 자주 불러주고, 자주 쳐 줘야겠다. 내 피아노가 그동안 내지 못했던 소리를 좀 찾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