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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Jul 08. 2024

다른 육아

연재소설


4. 다른 육아


수인은 겨우 시간 맞춰 ABA 센터 선생님에게 준후를 맡기고 대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도 내리는 데다 사고라도 났는지 차가 막혀 늦을뻔했는데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여기는 5분, 10분 늦어도 보충해서 수업해주지 않고 칼같이 수업시간을 엄수한다. 지방에 몇 군데 없기도 했고 대기가 길어서 그런지 아이가 아파서 수업을 못 받는다 해도 빠진 수업을 이월해 주거나 보충해주지 않는다. 1회기당 가격도 만만치 않아 지각하거나 한번 빠지면 타격이 크다. 이런 아이들 가지고 갑질하나 생각할 때면 울끈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여기도 긴 대기를 뚫고 겨우 들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수인이 창밖을 내다보며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가방 안에 진동이 느껴졌다. 폰 액정을 보니 친구 은주의 전화였다. 수인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 수인아, 어디야? 준후는 잘 지내?


수인은 알고 있다. 은주는 수인과 준후의 안부를 물었지만 답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다는 것.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얼른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은주는 예전 직장 동료였다. 같은 나이였지만 은주가 1년 늦게 입사했는데 대학동기인 것을 알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일 끝나면 둘이 쇼핑하러 가거나 술집에 가서 직장 상사 욕도 하고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고민을 서로 털어놓었다. 서로 너 없이는 직장 못 버티겠다느니 하다가 결국 은주가 결혼하며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 다닐 때만큼은 자주 연락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나눴다. 하지만 준후가 그렇게 된 뒤로 수인은 차츰 전화를 먼저 걸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였지만 준후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고 싶지 않아 은주는 준후가 그저 느리다고만 알고 있다.


“무슨 일이야?”

- 아니, 하람이 말이야. 어휴, 애 키우는 게 왜 이리 힘드니.

하람이는 은주의 자녀인데 준후보다 1년 늦게 태어났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은주와 아이 고민을 나누며 육아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어느 순간 하람이와 준후 사이의 발달의 갭이 커져 더 이상 공통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 애가 왜 이리 고집이 세니. 지금 다니는 태권도학원 그만두고 영어학원 보내려고 하니 안 간다고 고집부리잖아. 영어학원에 친구들이 몇 명 없다느니, 숙제가 많다느니 하며 따지네.

"그럼 태권도학원 계속 보내면 되잖아?"

- 어머, 얘는. 지금 이 시기에 영어학원을 다녀야 발음도 유창하고 학교 들어가서도 영어 때문에 고생 안 한대. 다른 애들은 벌써 그래머 몇 레벨인 줄 아니? 하람이는 한참 늦었어.

"아, 그래..?"

- 하람이 아빠는 하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해주자 하지만 내가 이렇게 관리를 했으니 이 정도지, 남편이 키웠으면 아직 한글도 못 뗐어. 하람이가 친구들이랑 노는 것만 좋아하지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네.


은주의 말에 수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준후는 아직 한글 떼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수인이 보기엔 하람이가 잘 크고 있는 것 같은데 은주는 뭐가 그리 걱정인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몇 없는 치료 센터 알아보느라 전전긍긍하는데 얘는 영어학원 보내는 거에 고민하는구나.


아파트 앞 상가를 보면 죄다 태권도학원, 피아노학원, 영어학원 등이 즐비하다. 하지만 준후가 갈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예전에 한번 준후를 데리고 태권도장에 갔다가 관장님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 아이가 태권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저희는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사범 2명에 아이들 여럿 가르치는 것도 버거운데 이런 아이까지 있으면 컨트롤이 잘 안 되거든요. 죄송합니다."


맘카페에 들어가면 애가 반찬투정을 해서 걱정이라느니, 애가 엄마 껌딱지라느니, 질문을 많이 해 피곤하다느니, 학원을 어디 보내야 할지 고민이라는 등의 글이 쏟아진다.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수인은 준후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준후는 어른들에게 같이 놀아달라는 것도 없이 피규어 줄을 세우거나 소리 나는 장난감 버튼을 누르며 혼자 잘 놀았다. 말도 못 하니 귀찮게 질문을 한 적도 없고 엄마껌딱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수인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준후는 안 그러는데? 준후는 얌전하게 잘 있는데?


며칠 전 마트에 갔다가 3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장난감 코너에서 바닥에 누워 발버둥 치며 우는 걸 봤다. 아이 엄마는 그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엄마가 사주지 않아 떼를 쓰는 모양이었다. 준후가 어릴 때만 해도 수인은 그런 아이들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준후는 뭘 사달라고 조르거나 고집을 피운 적이 없었다. 우리 준후는 저렇게 생떼를 피우지 않는데. 저런 애를 키우는 엄마가 안 됐네.


하지만 수인은 지금 그런 모습이 부럽다. 그만큼 아이가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거고 잘 크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놀이터에 가면 다 큰 애 뒤에 엄마가 졸졸 따라다니는 건 준후밖에 없다. 다른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기구를 타거나 무리 지어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고 엄마들은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육아 고충을 털어놓느라 바쁘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은 똑같지만 다른 육아를 하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핸드폰 너머에서 은주는 계속 재잘거리고 있었지만 수인은 이미 듣지 않았다. 아니, 듣고 있지만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수인은 은주에게 괴리감이 들었다. 은주의 고민들은 수인에게 그저 투정으로 들릴 뿐이었다.


은주와의 전화를 끊고 수인은 은주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엄마들의 육아고민은 당연한 건데 나와 달라서, 이해를 못 해서, 나는 겪을 수 없어서, 부러워서 그들의 걱정을 투정으로 치부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다. 언제쯤 은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평생 다른 사람과 벽치며 살아야 되나 수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찬 빗소리가 수인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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