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당을 혁신해 나가다
국가 사회주의를 창건한 사회 부적응자들에게는 이상한 점들이 종합선물세트 마냥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시작했던 이 운동이 13년 안에 나라 전역을 휩쓸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말이다. 그리고는 독일을 제 3제국으로 만들었다.
이 혼란스런 자물쇠공인 드렉슬러는 이 운동의 핵심을 제공했고, 술주정뱅이 시인인 에카르트는 그 "영적인" 기초를 상당량 더했으며, 경제 분야의 괴짜인 페더는 사상을 전수했고, 동성애자인 룀은 육군과 퇴역군인의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직 서른 한 살이 완전히 안되고 완전히 미지의 존재이자 이전에 부랑자 신세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뒷방에 앉아 사회 문제를 토론하는 것에 지나지 않던 모임을 곧 무적의 정당이 될 수 있도록 건설하게 되는 바로 그 존재였다. 이것은 히틀러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비엔나에서 배고프고 외로왔던 나날들 이래로 히틀러의 머리에서 거품처럼 쏟아졌던 모든 생각들이 이제 배출구를 찾았고, 외양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내적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가입한 소심한 위원회가 더 큰 모임들을 조직하도록 촉구했다. 히틀러 자신이 직접 타자를 쳐서 만든 초대장을 분배했다. 나중에 자신이 이것들 중 80부를 분배한 다음의 일을 회상했다.
"우리는 나타나기로 기대되는 사람들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늦게, '의장'은 '회의'를 개회해야만 했다. 우리는 다시 일곱, 원래의 일곱 명만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낙담하지 않았다.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방법을 통해서 초대장의 수량을 더욱 늘렸다. 히틀러는 몇 마르크의 돈을 걷어서 지역 신문에 회의가 있다고 하는 공지를 삽입했다.
"성공은 분명히 놀라웠다. 백 열 한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첫 "공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 것은 "뮌헨 교수"의 메인 스피치 다음 순서였다.
당의 명목상 당수였던 하레르는 반대했다.
"이 신사는 명백히 다른 측면으로는 정직했다."
히틀러가 언급했다.
"내가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납득할 지도 몰랐지만, 연설에서는 아니었다. 나는 삼십 분 동안 말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해 알지 않고서 내 속에서 느낄 수 있기 전까지는 현실에 의해 판명되었다. 나는 말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그 청중이 자신의 연설과 그 열정에 의해 "전율했고", 삼백 마르크의 기부에 의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기부 탓에 일시적으로 당은 재정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920년대의 시작 무렵에, 히틀러는 당의 프로파간다를 장악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비엔나에서 사회당과 기독사회당을 보고 그 중요성을 관찰했던 이래로 거기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던 활동이었다.
히틀러는 즉시 이 가련하게 작은 정당이 꿈으로만 상상해봤던 그것만큼 가능한 최대한 큰 집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24일, 거의 이천 명의 좌석을 수용가능한 유명한 호프보로이하우스의 페스트잘에서 개최되었다.
동료 당원들은 히틀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레르는 반대의 의미로 사임했고 드렉슬러가 그 자리를 물려 받았는데, 드렉슬러 역시 회의적인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개인적으로 이 모든 준비들을 수행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 그에게 행사는 너무 큰것으로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나의 투쟁의 첫 권에서 이 점에 대한 묘사를 했다. 히틀러의 설명에 따르면 "작은 모임으로 좁은 유대 속에 갇혀 있던 정당이 그것을 깨고 처음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요인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햇다. 바로 대중의 의견이다."
히틀러는 메인 스피치를 담당하는 연사로서만 일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역할은 동종요법 의사인 요하네스 딩펠더 박사를 위해 남겨졌다. 박사는 "게르마누스 아그리콜라"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경제학에 대한 기사들을 제공하는 괴짜였는데, 그리고는 곧 잊혀졌다. 연설을 시작할 때 청중들은 조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함성이 물결쳤다. 회장에는 격렬한 언쟁들이 터져나왔다. 가장 신뢰하는 전쟁 동지들 일단과 다른 지지자들이 방해자들과 싸웠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단지 조금씩 조금씩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계속 연설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30분 정도 후에 박수가 천천히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들을 들리지 않도록 만들기 시작했다... 거의 네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회장은 비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 잊혀질 수 없는 이 운동의 이론들이 독일 민족 전체에 걸쳐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