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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Oct 23. 2021

미니 호캉스 지침서

왜 지금까지 아무도 안 알려준 건지 알다가도 모를 지침서.

호텔에서 일했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들이 있다. 국내에서 제일 좋은 호텔은 어딘지, 호텔은 왜 그렇게 비싼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호텔은 어딘지. 그중 가장 많이 질문했던 럭셔리 호텔 호캉스 관련 질문들을 모았다. 


Q. 호캉스 하기 좋은 시기는?

무조건 비수기 평일. 주말,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는 피해야 한다. 성수기에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평일에 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직원과 게스트가 닿는 모먼트를 위해서다. 체크인도 그 모먼트 중 하나인데, 럭셔리 호텔의 체크인 권장 시간은 5~6분으로 일반 호텔보다 긴 편에 속한다. 이때 게스트와 호텔이 서로를 알아가는 첫 유대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모먼트다. 스몰 토크를 적절히 섞인 체크인은 생각보다 유쾌하다. 단순히 신분증을 확인하고 키카드를 주는 과정이 아닌데, 성수기에 하는 체크인은 무거운 출입국심사와 다름없다.


Q. 호텔비를 아낄 수 있는 법은?

각자의 서칭 능력에 따라 할인 받을 수 있는 폭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럭셔리 호텔에서의 호캉스를 계획하고 있다면 직접 예약과를 통한 예약을 추천한다. 클릭 몇 번이면 편하게 예약할 수 있는 요즘 그런 옛날 방식은 별로라 하겠지만, 럭셔리 호텔에서의 경험은 체크인 전인 예약 시점부터 시작된다. 럭셔리 호텔에서는 기대해야 하는 시점부터 다르기 때문에 최초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면 경험의 시작 역시 달라질 것. 실제로 어떤 게스트는 본인의 예약 디테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예약과 직원 때문에 여러 번 투숙했었다. 예약과는 백 오피스의 일부라 프런트에 거의 나올 일이 없는데, 그 직원은 늘 그 게스트를 맞이하기 위해 프런트로 넘어오곤 했었다.


Q.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가면 더 좋은 방을 준다?

모든 객실의 사전 배정은 당일 오전에 마무리된다. 사전 배정은 성수기와 비수기를 가리지 않고 매일 이뤄지는 프로세스로 만약 이 프로세스가 빠진다면 체크인을 하고 싶은 프런트 직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수기에는 더더욱 일찍 갈 필요가 없다. 간혹 객실 배정이 선착순이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객실 점유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방을 절대 옮기지 말라는 플래그를 시스템에 띄우며 호텔은 더 철저하게 사전 배정을 한다. 평일은 주말보다 객실 점유율이 낮기에 경우에 따라 더 나은 뷰나 층으로 재배정될 확률이 조금 있을 수 있지만, 이것도 역시 케바케. 


Q. 호텔에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럭셔리 호텔에서는 의외로 굉장히 많은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고층/저층, 금연/흡연, 베개 종류, 공기청정기와 같은 다양한 가전 어메니티를 요청할 수 있다. 호텔마다 제공하는 품목들과 서비스가 다르니 여긴 왜 이게 없고 저게 없는지 불평하지 말자. 그리고 원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 당일 호텔 상황 및 재고 현황에 따라 요청 사항이 반영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언제나 염두하고 있어야 한다. 호텔에 요청하는 모든 사항은 이 점에 모두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요청하는 것이니 모두 열린 마음을 갖고 방 배정 결과를 기다리자.


Q. 호캉스 팁? 꼭 '경험'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면?

럭셔리 호텔의 핵심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다. 가장 최근에 오픈한 호텔일수록 최신 기술과 명품 브랜드 가전, 가구, 인테리어가 합세한 최고에 최고를 더한 하드웨어를 선보인다. 게스트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인 서비스다. 이때 중요한 건 서비스를 누리겠다는 것이 아닌, 경험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경험이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이 컨시어지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앞서 이야기했듯 국내에서는 컨시어지라는 팀이 정체성을 지키며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지 않아 경험의 실현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혹 보석 같은 컨시어지들이 발견할 수 있으니 로비에서 그들을 찾아보자. 로컬인 게스트도 이미 로컬을 잘 알고 있지만, 게스트와 같은 로컬 '컨시어지'의 눈으로 본 당신이 몰랐던 로컬 경험을 설계해줄지 모른다. 컨시어지 많사부! 그리고 룸서비스를 빼먹을 수 없다. 호캉스는 수영장, 사우나보다 룸서비스다. 룸서비스는 럭셔리가 발현된 또 하나의 다이닝 형태로 이는 모든 호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연하고 흔한 서비스가 아니다. 룸서비스다운 룸서비스는 럭셔리 호텔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살면서 어느 누가 내 방까지 다 차린 밥상을 가져다줄까? 심지어 다 먹고 나면 밥상째 갖고 가기에 뒷처리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편하다는 배민과 쿠팡 이츠도 밥상째 차려서 갖다주진 않는다.


럭셔리 호텔에서의 호캉스는 게스트로서 할 수 있는 경험과 모먼트에 많은 무게를 싣자. 서비스를 받으러 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호텔 브랜드와 서비스를 주도적으로 흠뻑 경험하는 것이 럭셔리다. 하지만 국내 럭셔리 호텔에서의 호캉스는 어딜 가도 다 비슷비슷하다. 개인적으로 다음 달쯤 호캉스를 계획하고 있는데 딱히 가고 싶은 호텔이 없어 고민이다. 나의 호캉스를 고민하자니 럭셔리 호텔 간의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경쟁은 과연 언제쯤 시작될 수 있을지, 누군가는 고민은 하고 있을지 참 새삼스러운 걱정을 하게 된다. 거기서 거기인 호캉스에 승부수를 띄울 브랜드가 과연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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