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완성과 다시 허무는 모순 사이
중증의 불안장애와 그보다는 경미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첫 진료 때는 허락된 20분 내내 꺼이꺼이 서럽게 울음만 토해냈다. 창피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조차 제대로 들어주려 않는 내 어찌할 줄 모르겠는 슬픔을 누군가 성의껏 들어주고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2만 원의 위력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갑작스러운 봄날의 방황.
가장 행복할 거라 기대했던 공사의 끝자락에 기본적인 양심도 예의도 없이 찾아든 기습폭격 같았던 우울증 그리고 그 우울증을 유발시킨 불안감. 처음엔 그 불안을 내 태생적인 나약한 멘탈탓으로만 돌렸다. 하지만 간절히 이루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었다. 간절하면 누구나 예민해지고 불안해진다. 나만 유독 이상한 건 아니라는 기분 좋은 위로였다. (물론 유리멘탈에 가까운 건 인정한다.)
내 삶이 촘촘히 채워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피곤하고 고달팠다. 나의 새 집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뭐 대단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내 팔자가 원래 이렇지 뭐...' 자조 섞인 한탄 속에 그 사이 부쩍 늙어버린 내 모습만 보였다. 과거 행복했던 사진을 들춰내며 결코 불행하진 않은 내 현재를 저울에 달았다. 내가 뭔가를 이뤘다고 한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도 맑게 반짝이던 과거의 나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렇게 나이만 먹어 가는 게 겁이 나서 결연하게 시작한 내 삶의 리모델링, 기대보다 초라함에 황망해했다.
당장 펑! 하고 터질 만큼 부풀었던 기대감은 아주 여리여리한 자극에 '피식~'하고 시시하게 바람이 빠져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늙는다는 건 참 공평하고 객관적인데 그 늙음을 겪는 과정은 너무도 주관적이라서 모두 다 나이 든다는 무성의한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것 말고 덧붙일 진실이란 게 더 있을까도 싶지만.
나를 막 지나간 봄날은 그랬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지난 봄날의 대책 없던 극단의 감정은 이 모든 여정의 마지막 절정의 고비였다. 발단· 전개· 위기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우뚝 솟은 절정의 그래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조금만 더 견디면 돼' 라며 다독여온 그 많던 클라이맥스의 순간들은 그저 자잘한 위기들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 결말을 향한 극의 흐름이 언제나 그렇듯 격정의 갈등은 해결됐고, 드디어 내 삶 시즌 1의 대단원을 맞이했다.
물론 거저 얻은 결말은 아니다. 싫지만, 내가 서툴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몇 달 동안 매일 밤 정신과 약도 빠짐없이 복용했다. 자기 연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끔 마음을 천천히 관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필요했다.
산책, 기도, 독서, 미술관, 글쓰기, 멍 때리기, 어쩌다 명상
산책, 기도, 독서, 미술관, 글쓰기, 멍 때리기, 어쩌다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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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동안 산책, 기도, 독서, 미술관, 글쓰기, 멍 때리기, 어쩌다 명상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혼자 편의점 와인 마시기까지 (이건 좀 별로지만 그래도 당시 내겐 건강보조제 같은 거였다), 무척이나 얌전한 태도로 봄날이 갔다. 그러다 문득! 어느덧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게 필요했던 것만큼 정확히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모든 걸 삼켜버린다는 크로노스가 결국 내 우울마저 삼켜버렸다는 것을.
그제서야 하나를 이루려면 지극한 정성과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한 법이라는 진리를 알아차린다. 분명하다. 나는 헌신까지는 않으려 했다. 귀중한 것을 가지고 싶어 하면서 '왜 이렇게 내 삶은 항상 견뎌내야 하는 걸까?' 라며 언제나 불평이 앞섰다. 큰 행운과 천재성을 타고나지 않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이 정도의 장렬한 노력쯤은 해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평범한 사실에 깨달음을 운운하며 어둠을 한껏 걷어올렸다. 동그란 광배처럼 7월의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1979년식 작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리모델링합니다."
내 오랜 삶도 리모델링하는 리추얼한 의식
이 집이 하나의 설치 미술 작품처럼 리모델링되길 원한 것처럼, 내 삶 또한 예술적으로 리모델링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히 꿈꿨다. 하지만 자꾸만 손볼 곳이 생겨나는 이 오래된 단독주택의 리모델링 공사처럼 삶이라는 건 결코 한 번에 전복되진 않는다. 한 단계 한 단계 낯선 이국의 땅을 호기심으로 여행하듯 평생을 두고 스스로를 알아가며 원하는 모습으로 리모델링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저 내 삶의 새로운 방향성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고 더없이 아름답다.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다. 지난 시간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후회도 없을 때 비로소 과거는 과거로서 평온하게 남겨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를 희생해서라도 뭔가를 더하려는 과잉된 욕심을 끊고 '자! 여기까지 하자'라고 쿨하게 돌아설 수 있는 수준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 정도면 나의 이 집처럼 환골탈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도 조금은 리모델링된 셈인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던 야누스 같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은 이제 막 내 삶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지점에서 또 다른 출발을 하려 한다. 그토록 원하고 궁금해하는 예술적 삶의 다음 단계를 위해 나를 다시 시험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인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야누스의 새로운 문 앞에 다시 선다.
자, 다시 한번 시작해 볼까?
무릇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여 있으니까.
집도 삶도 여! 전! 히! 리모델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