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말 시간이 많고 심심하구나?”
“딩동댕! 정답이야.”
친구들에게 성탄 선물로 주려고 포토머그컵을 만들었다. 독서 모임 친구들과 1년 동안 함께 읽은 책 25권이 책장에 꽂혀 있는 그림을 그려 머그컵에 인쇄했다. 12월 송년 모임에서 나눠 줄 계획이다. 내가 서울까지 들고 갈 수 없어 친구에게 택배를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친구가 심심하냐며 웃었다. 머그컵을 직접 굽지 않았지만 그림은 내가 그렸으니 내가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의 나라면 내가 만든 것을 절대로 선물하지 않는다. 손재주도 없고 손재주가 없으니 예쁘게 만들지도 못하고 얼추 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려면 시간이 곱절로 필요하다. 마음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그랬다.
시골에서 나의 시간은 요상하다. 바쁜 듯 한가한 듯하다.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려니 분주하다. 간소하게 먹는데도 그렇다. 부엌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밥 해 먹는 것을 빼면 특별히 할 일이 정해진 게 없으니 한가하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더 한가해졌다. 올해 텃밭농사는 시금치 씨를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멍을 때린다.
11월 초부터 작업실 화목 난로에 불을 피웠다. 차 한 잔 들고 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빨간 장작불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바라본다. 너무 멍해져서 뜨거운 것을 맨 손으로 덥석 잡기도 한다. 앗, 뜨거워. 처음부터 불멍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난로 근처가 따뜻해서 앉아있다 보니 시시때때로 불멍이다. 밥 먹고 나서 배불러서 불멍, 고된 노동을 한 후 쉬면서 불멍, 난로 위에서 따뜻하게 끓은 보리차를 마시며 불멍이다. 예전에 가끔 산책을 했던 군포시 반월호수 근처 캠핑용품 판매장의 마당에 불멍 하도록 준비된 공간이 있었다. 시간당 6만 원인가 그랬다. 도시인들이 돈을 주고 하는 불멍을 나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불멍이 전부가 아니다. 앞산을 바라보면서도 멍을 때린다. 봄의 초록이 예뻐서, 여름의 숲은 얼마나 시원할까 상상하면서,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겨울 눈꽃에 반해서 멍하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기를 한다. 뒷산의 대나무들이 사르륵 거리는 소리에 멍하니 있다. 나는 멍 때리기의 달인이 되려나 보다. 앞집 부부가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멍을 때렸다.
멍 때리기를 하다 가끔 잠이 들기도 하고 가끔은 별별 생각을 한다. 포토머그컵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온라인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의 기억력에 예전만 못하다. 자꾸만 함께 읽은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그런다. 심지어 책 제목도 처음 듣는다며 놀란다. 물론 나도 그렇다.
‘우리가 읽은 책을 정리해야겠구나. 목록을 만들어 놓기만 하면 소용이 있을까. 눈에 안 보이면 또 잊을 텐데. 책갈피로 만들까? 책갈피는 잃어버리기 쉬운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포토머그컵을 만들기로 했다. 머그컵에 인쇄할 그림은 프로크리에이트 앱(아이패드에서 사용하는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그렸다.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림을 완성했고 머그컵도 만들었다.
“선물 고맙다. 감동이다. 내년에도 해 줄 거야?”
“글쎄, 헤헤헤”
내년에는 컵을 내가 직접 구울까? 찻사발로 유명한 문경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도 많고 교육프로그램도 꽤 있다고 들었다. 멍 때리기를 하다 무슨 일을 작당할지 모르겠다. 멍을 때리다 친구들 선물을 마련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다. 송년회에서 다른 친구들도 좋아하겠지? 기뻐할 친구들을 생각하니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