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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01. 2021

코로나 사태 속에서 주목받는 행동경제학

           <넛지> 

코로나 19 감염 사태가 2년 이상 길게 이어지면서, 세계 각국 정부가 감염 사태에 지친 사람들에게 어떡하면 감염예방 협력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발신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문이, 인간의 심리를 경제행동의 분석에 활용하고 있는 행동경제학이다. 일본 등 일부 나라에서는 정부가 코로나 대책을 마련할 때 행동경제학자의 조언을 듣는 등, 행동경제학 수법을 행정에 활용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행동경제학자들도 독자적으로 여러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감염 방지와 백신 접종에 협력적으로 유인할 수 있는가를 활발하게 연구해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행동경제학이 코로나 대책에 어느 정도 활용되고 있는지는 정보가 없어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도 행동경제학과 관련한 책이 이미 많이 소개돼 있다. 그 중에서도 201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탈러(세일러)가 캐스 선스타인과 함께 쓴 <넛지>(리더스북, 2009년 초판)가 대표적이다. 넛지는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어깨로 넌지시 건드리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효과를 말하는 행동경제학의 용어다.


넛지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는 남자 화장실 변기 속에 파리를 그려놓음으로써, 남자의 소변이 변기 바깥으로 투지 않게 유도한 것이다. 네덜란드 스키폴공항 화장실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파리 그림이 없을 때보다 소변이 변기 밖으로 튀는 양을 80%

나 줄였다고 한다. 지금은 스키폴공항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장실에서도 비슷한 수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넛지를 포함한 행동경제학의 수법은 코로나 감염 예방에도 유용하다. 행동경제학자들은, 특히 손해 보는 것을 피하고 행동 제약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활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감염 방지를 위해 올해는 추석 귀향을 자제합시다"라고 하는 것보다 "올해 추석 귀향은 온라인으로 합시다"라는 식으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손실 회피-이익 선호' 경향은, 인지심리학자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탄 대니얼 커너먼의 역사적인 실험에서 확인된 바 있다. 커너먼은 가상의 '아시아질병'이 퍼져 아무 대책을 취하지 않을 경우 600명이 죽는다는 가정 아래, 실험 참가자들에게 정부가 2가지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데  1)200명을 살릴 수 방안 2)400명이 죽는 방안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어느 쪽이든 200명이 살고 400명이 죽는 것이 같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200명을 살리는 방안을 선택했다. 조삼모사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인간의 행동이 주류경제학이 가정하는 것처럼 반드시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다.


  넛지 수법 외에 디폴트 수법도 사회적 거리두기 대책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회사가 감염방지 대책으로 재택근무를 사용할 때 '출근'과 '재택' 중에서 불가피하게 '재택'을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재택'이 기본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발신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신 접종률을 높이는 방안에도 행동경제학 수법은 유효하다. 예를 들어, 최근 페이스북에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페북 사진에 백신완료를 뜻하는 디지털 배지를 두르게 하는 캠페인은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고 싶은 심리를 자극하는 '하딩효과'를 활용한 것이다. 또 행동경제학자들은 "백신 접종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자"는 메시지보다 "접종 기회를 놓치지 마"라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손실 회피 심리를 강하게 자극함으써 접종률 제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권덕칠 보거복지부 장관이 9월 28일 방송기자클럽 초정 토론회에 참석해 "접종완료자를 중심으로 우선 사적 모임, 다중이용시설 거리두기 완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외에선 백신 패스를 적용하는 사례가 있는데 우리도 이런 백신 패스를 적용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접종률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넛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심리를 활용한 행동경제학의 수법이 격리와 소독을 통한 예방과 백신 접종 및 치료약 개발을 주축으로 하는 감염 대책을 근본적으로 대체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런 행동경제학의 수법이 감염 확산을 지연시키면서 의료 및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정비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보조적인 효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다.


 나는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억제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체제이기 때문에 행동경제학 수법이 더욱 현실적이고 효과도 있다고 생각한다. 행동경제학의 근본 정신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이기 때문이다. 


 <넛지>에는 민주주의체제에 사는 우리들이 여러 분야에서 참고할 수 있는 방법들이 가득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닻내림 효과(앵커링 효과)'가 쏙 들어왔다. 이 수법은 자선단체가 어떤 사람에게 기부를 요청할 때 1000원보다 10,000을 제시할 경우 더욱 많은 기부금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으로, 처음 기준을 제시하는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위안부 티에프를 하던 때를 되돌아보니, 12.28 위안부 합의안의 초안을 일본 쪽에서 제시하고 결과적으로 일본 쪽 초안의 범위 안에서 협상이 이뤄진 것이 떠올랐다. 문득 일본이 '닻내림 효과'를 이용했고 우리가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행동경제학과 코로나 사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마는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둘 사이엔 추상의 수준만 다를 뿐이다. 유능한 정책 담당자는 추상화돼 있는 이론을 현실의 구체적 수준으로 끌어내어 활용하는 사람이고, 유능한 학자는 이론을 현실에 활용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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