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비교적 크게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 같이 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것이 더 편하고 좋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특성이라고 여기며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편안하지 않은지 알려고 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늘 함께 하기에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궁금했습니다. 엄마와는 잘하려고 해도 마음이 담기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엄마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를 이해하려 합니다. 나는 왜 그럴까? 나를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할지 방법을 찾아보려 합니다.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고 혼자서 병원에 입원해 '나 병원이다.' 한마디 던져놓고 전화를 끊으셨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 꾹꾹 밀어 넣어 놓은 화가 '악 '이라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지만 난 또 꾸역꾸역 삼키며 '갈게' 했다. 걱정보다 화가 나를 흔들었다.
순간 눈물이 났다. 왜일까?
미안함일까? 부담감일까? 버거움일까? 억울함일까? 걱정일까? 어떤 마음이 눈물로 대신 말을 하는 것일까?
며칠 전에도 만났었는데 말 한마디 없다가 갑자기 '나 병원이다'.
엄마는 늘 그랬다. 내 생각을 말하면 늘' 시끄러워' 한마디였고 엄마 당신 마음대로 했다.
그거였구나. 미리 알려주거나 의논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었구나.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서운함이었구나.
'그래 알겠어. 마음~ 존중받고 싶은 거. 그게 전부니?
아니~ 또 있어 내가 들어준다고 하니 마음이 주저리주저리 보따리를 푼다.
감기 몸살인지 아니면 고질병처럼 달고 사는 변비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도 지금 컨디션이 안 좋아 며칠째 밥도 못 먹고 끙끙 앓고 있잖아. 그런데 그 몸으로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겠다.
'아~ 그랬구나'
감정이라는 녀석의 수다가 계속될수록 엉켜있던 마음이 정리가 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예전 같으면 전화 끊자마자 달려갔겠지만 오늘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오늘은 이성으로 통제하지 않고 감정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내가 먼저 기운을 차려야 했다. 이 몸으로는 병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딸기 두 알을 입에 넣는다. 딸기가 모래알 같았다.
그리고 역할을 나누기 위해 2남 2녀 단체 톡 방에 사연을 올리고 각자 시간 나는 대로 함께 돌보자고 요청한다. 일단 부담감이라는 녀석을 해결했다.
하루를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끙끙 앓았다. 마음껏 앓고 나니 병원에 있는 엄마가 눈에 밟혔다. 병원에 가겠다고 전화를 하니 "아버지랑 같이 시간 맞춰 와서 점심 먹자"라고 하신다. "아~ 또!!!!'"짜증이 확 올라오는 것을 다시 삼킨다.
아프다면서 아버지까지 챙기는 엄마 모습에 화가 나고,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고 내 상황이 아버지까지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는데~내 상황이나 내 감정은 늘 열외로 하면서 당신의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는 듯한 엄마 모습에 화가 난다.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과하게 화가 올라온다.
오십이 넘은 딸이 해야 할 일도 당신이 다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그 태도에 짜증이 올라오고 아프다면서 아버지까지 챙기시는 그 오지랖에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시간을 잡았다.
'아버지는 좋겠다. 이렇게 챙겨주는 아내가 있어서~ '
한때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해주는 엄마가 오히려 편하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편안함이 불편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내 문제였다. 난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쑤셔 넣는다. 좀 길게 아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언젠가부터 내가 나를 무시하면 내 마음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되었다는 엄마는 얼굴이 좋아 보였다.
"엄마, 왜 갑자기 입원하게 된 거야..."
미리 의논하지 않아서 서운했다는 말을 할 생각으로 질문을 했다.
"며칠 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끙끙 앓았는데 너희 아버지가 못 본 척하고 시골 간다고 하고 가버리더라. 너 그거 아냐? 아픈 거보다 고픈 게 더 힘들더라. 마음이 고파지니 서러워지더라. 그래서 입원했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신 후로는 제2의 직업을 선택하셨다. 농부.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일이고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으니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분이다. 나도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곳이 주는 편안함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 그곳은 외롭고 두렵고 부담스럽고 언제나 떠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그렇게 아팠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기에 나도 아버지처럼 시간이 날 때면 습관처럼 다녀오곤 한다. 아버지도 그러셨을 게다. 엄마와 함께하는 무미건조함 보다는 가끔 그곳이 주는 온기가 그리웠으리라.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으리라. 그 뒷모습을 엄마도 느끼셨기에 서러웠던 모양이다.
마음이 고파지니 서러워지더라. 아픈 거보다 고픈 게 더 힘들더라.
'장군 같았던 우리 엄마도 여자였구나. '순간 엄마의 외로움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미안해진다.
엄마가 아버지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은 당신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였나 보다. '아픈 거보다 고픈 게 더 힘들더라'는 말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님들
머리로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아는데 마음은 굳건하게 문을 잠그고 몸이 움직이지 않을땐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해요. 내 마음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분명 나는 나다운 선택을 할 거예요. 그 선택이 나의 후회를 줄여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