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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Mar 13. 2023

엄마의 외로움이 나의 두려움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함께 해도 외로운 그 시간의 가족

'고픈 게 아픈 것보다 더 힘들더라'는 엄마의 한마디가 귓가에서 맴돈다.

외로웠던 엄마의 마음에 머무는 것도 잠시~이기적인 난, 내 노후가 덜컥 겁이 난다.

지금도 골골, 몸은 종합병원이고

직장에 친절과 배려는 헌납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들쑥날쑥 널 뛰었는데~몸이 아픈 고통을 알기에 머리가 더 부산해진다.


텔레파시가 통했나? 아들에게 전화가 온다.

이때다 싶었다. 외롭지 않게 보험 하나는 들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코에 바람을 잔뜩 넣은 목소리로 아들을 부른다.

"아~~ 들"

"응, 엄마~"라는 형식적인 대답 후에 축구하다가 얼굴에 공을 맞아 코를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목소리로는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도 생각이 정지되어 간신히 입을 뗀다.

"많이 다쳤어? 병원이야?"

물으니 생활하는 데는 지장은 없는데 잠잘 때 코골이가 심해져서 수술을 해야 한단다.


자식이 뭔지~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는 짜증이 나더니 아들이 아프다고 하니 심장이 널뛰기를 한다.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괜찮다는 말로 아들의 안위를 확인하자 속마음을 전달한다.

"아들, 너의 몸의 지분은 엄마에게도 있으니 상처 나지 않게 잘 사용해 줘"

미안했나? 아들 녀석이 시원하게 대답한다.

"알지! 알지! 걱정 마!"

호탕한 목소리에 정신이 다시 집을 찾아 들어온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아들~ 엄마가 할머니 나이 되면 엄마 외롭지 않게 돌봐줄 거지?"  

이게 무슨 이중적인 태도인가? 나는 싫으면서 아들에게는 요구하는, 엄마의 전화는 부담스러워  짜증을 내면서 난 내 불안감을 아들에게 의존하며 감소키고자 하고 있었다.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심리적 부담감을 아들 어깨에 얹고 있었던 것이다.


"잉? 엄마 스스로 자립심을 가지고 살아야지!"

아들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마음속에서는 수만 가지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꾹 '참고  웃으며 ' 네 '라고 하면서 행동은 미루고 미루다 간신히 하는 소극적 저항을  선택하는데 아들은 명쾌하다.


순간 멍해진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기댈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시원하게  '물론 당연하지'라는 말을 기대했었다. 그 말에  안정감을 느끼고 든든함을 저장하고 싶었다.


그런데 들려온 말은 자립심을 가지고 살란다. 서운함과 억울함이 밀려온다.

'내가 지 녀석을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 섬기고 아들 키우니 낙동강 오리알이 된 기분이다.

멍해서 아무 말도 못 하자 아들 녀석이 다시 쐐기를 박는다.

"나는 엄마 육십 넘어도 해줄 게  없는데~그저 내가 열심히 살뿐이지"

'이 새끼가~' 마음속에서 알고 있는 거친 단어들이 줄을 지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도전한다.

"아들 서운하다."

그러자 아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한다.

"엄마 곧 괜찮아져. 나도 엄마가 학교 졸업하면 땡전 한 푼 지원 없다는 말이 서운했었는데 어느 순간 괜찮아지더라고. 엄마도 괜찮아질 거야."


 "맞다. 맞다."

자립심 있는 아들로 키우려고 경제적 지원은 학교 졸업 때까지 라고 했었다. 심리적으로도 무조건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를 신뢰해서 해결해 보고 어렵고 힘들 때 함께 의논하자고 했었다.


'내 발등 내가 찍었나. 이게 뭐지?' 한동안 멍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들이 침묵을 깬다.

"엄마! 성인이 되어 자립해도 나 사랑하잖아. 나도 그래. 경제적으로 엄마 지원받지 않아도, 또 내가 지원해주지 못해도, 엄마가 호호할머니가 되어도 엄마 사랑해. 다만 내가 말하려는 건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노후를 내 인생에 무조건 무임승차 하려고 하면 부담스럽다는 거지~"


잘 지내기 위한 일정한 안전거리를 확보하자는 말이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우리 아들만 그런가 다른 아이들도 그런가?'

'아이를 더 낳았어야 하는데 한 명만 낳았나?' 별의별 생각이 왔다가 간다.

대화 속도가 평소의 괘도를 이탈했나 보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아들이 부른다.


"엄마, 오늘 왜 그래~ 할머니가 아프니까 엄마도 걱정돼서 그래? 우리 김 여사님 왜 그러실까? 걱정 마. 서운하지 않게 자주 찾아가고 연락도 할 거야."


'서운하지 않게 자주 찾아가 주고 연락도 할 거야.'라는 말에 안도한다.

그러면서 머리에서는 아들 불편하지 않게 두 달에 한 번만 보자고 해야겠다고 나름 기준을 정해 본다. 오래 잘 지내기 위한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서운하지 않게 자주 찾아가 주고 연락도 할 거야'라는 말에 순간 고팠던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니 짓눌리던 어깨도 깃털이 된다.


그 순간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에게 들었다고 할머니 건강하시라고' 손주에게 전화받았다고. 칠십 중반 엄마의 목소리가 장군처럼 우렁차다. 마음이 채워지니 힘이 나나보다.


엄마가 원한 것도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인데 난 그것마저도 부담스러워 짜증이 났나 보다. 왜 그럴까? 언젠가부터 엄마는 함께하고 싶지만  불편한, 보고 싶지만  보면 짜증 나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운하지 않게 찾아가 줄게 라는 말에 마음에서 희망이 뜬다.

                                                                        


나이를 먹는다고 단단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엄마의 외로움이 내 마음의 두려움으로 옮겨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무 살의 아들이 두 여인을 품어 안았습니다. 오늘 이 순간의 가장 어른은 스무 살 청년입니다.


이중적인 나를 마주했습니다. 나는 엄마가 부담스러우면서 엄마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면서 아들에게는 은근히 의존하려는 나를 봅니다.  아들도 부담스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들은 나와는 달랐습니다. 하기 싫어도 하면서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은 이 정도라고 경계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경계가 더 안정감을 줍니다. 나도 엄마와 경계를 세워야겠습니다.



마음을 보듬어 줍니다.

언젠가부터 엄마와의 관계가 함께 하고 싶지만  짜증 나는, 보고 싶지만 불편한, 위로받고 싶지만 멀어지고 싶은, 불안정 애착 중 회피와 혼란 애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적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데 엄마와의 관계에서만 또렷하게 불편이 올라옵니다.  왜 그럴까? 멈추고 살펴봐야겠습니다.  

 내 마음이 정리가 되어야 엄마와의 관계도 편안해질 듯합니다.

아들이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을 채워주었던 것처럼 나도 편안하게 엄마 마음을 채워주고 싶습니다. 엄마와 나 사이도 마음이 채워지면 더 편안해지겠지요~ 마음이 채워지니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떠오릅니다.



나무님들은 엄마와의 관계가 어떠신가요? 자녀와의 관계는 어떠신가요? 불편하시다면 수면 위로 올려 저처럼 직면해 보실래요? 그리고 서로의 경계를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명료한 경계는 안정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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