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산다. 페르소나. 속마음을 숨기고 사회의 규범이나 관습에 따라 속마음과는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면이 오래될수록 두꺼울수록 우리는 진짜나와 보이는 나를 구별하지 못하고 보이는 나가 나의 전부인 것처럼 사는 날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 가면은 우리 인생의 걸림돌이 된다. 그 가면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엄마가 떠났던 초등학교 5학년. 난 괜찮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행복한 척하는 가면을 썼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엄마가 이사 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마을에서도 누군가 불쌍하게 보는 것이 싫어 씩씩한 척했다. 엄마가 있을 때와 동일한 돌봄을 받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의 진짜 나는 누군가가 안쓰럽게 볼까 봐 늘 긴장했고엄마가 하던 일을 대신하느라 힘들었고 버려졌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슬프고 좌절했었다. 그때 나는 참자기, 즉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그저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웃었고 평온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 가면이 한동안은 나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 가면 뒤엔 그림자가 있었다. 엄마아빠마저 잘 지내는 것으로 생각해 중학교 갈 때 데려간다는 약속이 고등학교 진학할 때로 일방적으로 옮겨져 버리고 말았다. 나도 동생도 나의 중학교 진학 때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는 우리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고 우리는 말할 용기도 내지 못했기에 엄마에게 전달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3년이라는 시간을 할머니와 더 지내야 했다. 그때 나는 이불속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를 다 이해하는 척 아니 엄마가 없어도 된다는 듯이 생활했다.
말할 용기도 없었고 말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말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내가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후유증이 컸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봐 긴장하면서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도 그리 섭섭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약속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약속을 해도 믿지 않는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엄마가 없어도 괜찮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대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아마 견디며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얼굴은 웃고 있고 잘 지내고 있는데 나는 동생에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내었고 동생과 나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서로 상처를 주며 싸우고 있었다. 기대했다가 무너진 상실감이 실망하고 절망하고 아파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약자가 더 약한 자에게.
슬펐다. 깊은 슬픔. 가슴에서는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그 슬픔은 상실에 의한 슬픔이었다. 부모로부터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하는 아이가 사랑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절망이 슬픔으로 자리해 눈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지금도 내 눈 안에 있다.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슬퍼도 화가 나도 사람들 앞에 있는 나는 웃고 있었다. 내가 쓰는 가면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었고 그 가면 덕분에 견뎠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가면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 가면의 부작용은 어른이 된 어느 지점까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침묵하니 만족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거절하지 않으니 일은 점점 늘어나 억울한 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 가면은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지쳤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나와 대화를 하면서 나를 직면하고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것 또한 본능적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mbti를 하면 estp라 타인들에겐 밝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진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에너지를 얻으며 그래야 다시 사람들 앞에서 늘 보였던 외향적이고 유쾌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가면을 쓴다. 어떤 아이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책상을 던지며 화를 내면서 강한 척을 하고, 어떤 이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웃으며 행복한 척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과하게 할 수 있는 척을 하며 자신을 혹사시킨다.
그리고 이 가면은 어른이 되어도 쉽게 벗겨지지 않고 가면이 두꺼우면 상대적으로 마음이 힘들어지고 마음을 돌보지 못하면 우리는 불안해져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한 척, 괜찮은 척, 할 수 있는 척을 해야 해서 결국 뿌리내림을 하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나무로 살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결국 그 나무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에 맞추어 살다가 나를 잃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돌봅니다.
나무야
약한 나도 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나도 나고
두려워하는 나도 나고
기대가 무너져 실망한 나도 나인데
나마저 너의 그 마음을 외면했구나
약해도, 버림받았다고 느껴도, 두려워해도, 기대가 무너져 실망해도
나에게 너는 소중한 사람이란다.
그러니 너답게 살아봐.
상처받은 너도 소중한 나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안다.
상처받은 나무 너를
가슴깊이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무님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하시나요?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진짜 부자는 부자인 척하지 않고, 정말 공부 잘하는 아이는 공부 잘한다고 스스로 소문내지 않으며, 진짜 강한 사람은 강한 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지 않아도 모두 다 인정해 주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기 때문에.
그럼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서는 강한 척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공부를 잘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죽어라 공부해서 잘하면 되는 것이고,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여주는 것이 진짜 강한 것이라는 것을.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날것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상은 나와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어야 하고 안전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만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용기가 필요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내가 가치 없게 느껴지면 가치 없게 느껴져 속상하다고 그대로 알려주고 수용해 주세요. 그 지점이 자기 사랑의 시작점인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단단한 뿌리내림을 한 나무는 예쁜 꽃을 피우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무성한 잎으로 돋보이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단단하게 뿌리 내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답게 사는 거 그것이 뿌리내림이고 가면을 벗고 편안해지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어떤 뿌리와 어떤 잎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디에 더 집중하고 있을까요? 그냥 우리답게 살기로 해요. 그래도 나무님들은 충분히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