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1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정수 i가 0부터 시작해서 10보다 작을 때까지 3씩 더해가면서 숫자를 출력하는 반복문이 있다고 할게요. 이걸 실행하면 화면에 어떻게 찍힐까요?"
"???....... 네?"
유림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 앞에 남자는 분명 '정수 i'라고 했고 또 '반복문'이라고 했다. 대학교 수시 입학 면접도 아니고, 취직 면접도 아닌 식당 써버 일자리를 위해 식당 매니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접시 나르는 거랑 정수 I가 대체 무슨 상관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는 유림의 얼굴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남자는 말을 이었다.
"쉬운 문제잖아요. 당신은 맞출 수 있을 거예요."
홀 담당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분명 한국인, 아니 적어도 코리안 캐네디언처럼 보였으나 굳이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력서에 적혀있는 정보를 통해 유림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배경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영어를 쓰는 방식과 억양으로 짐작해 보면 여기서 태어난 2 세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학교 2학년 이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온 1.5세대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상대가 어쨌건 간에, 유림은 써버 면접을 보러 와서 왜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사실 제가 지금 학교 과제 중이었거든요. 저는 컴퓨터 공학과를 다니고 있고요. 지금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체크하는 거예요."
이력서에 적혀있는 유림의 한국 경력을 보고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그런 날것의 알고리즘을 마주한 적이 있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대신 중학교 1학년 때 정보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대비반 때 풀었던 기초 문제를 떠올렸다.
"0 3 6...... 9?!"
"나이스! 그럼 거짓말쟁이는 아닌 걸로! 아, 혹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요.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지어내는 내용으로 채워 오거든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으라는 말들은 왜 항상 여지 없이 기분이 나쁠까? 남자는 그제야 랩탑을 한쪽으로 치우고는 유림과 눈을 맞췄다. 시종일관 랩탑을 바라보던 표정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였으나 왼손에서 이력서를 놓지 않았다. 이력서에 있는 일 경력 내용을 전부 확인할 셈인가? 그럼 뭐 다음에는 한글 맞춤법이라도 물어보려나? 써버 자리에 지원하는 사람에게 이력서 내용의 진위여부를 확인한다는 사람을 처음 보긴 했지만 사실 이런 이력서를 보면 누구나 이력서의 작성자가 허언증이 있지 않은지 의심할만하긴 했다. 게임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다가 출판사 편집자였다가 캐나다에 와서는 식당 매니저라니 이상하게 생각했다 해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써버를 뽑겠다는 면접에서 프로그래밍 알고리즘 문제를 풀어보라니, 별 또라이 같은 인터뷰가 다 있네 싶었으나 사실 똘아이 같은 건 내 이력이 아닐까, 유림은 잠깐 생각했다.
"그럼 다음 질문. 최근에 일한 곳이 식당 I라고 적혀있던데 그만두고 이곳에 지원한 이유는요?"
다행히 다른 이력에 대해서는 진실 여부가 크게 의심스럽지 않거나 그게 아니면 그냥 시간이 아까운 것 같았다. 남자는 드디어 식당 종업원을 뽑는 면접 자리에서 있을 법한 상식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시안 푸드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식 문화와 고객을 경험하며 저의 서비스 역량을 확장하고 싶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맞춰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한 달 전 일주일 간 수습 기간을 지냈던 일식당에서 유림은 잘렸다. 한 달 전쯤, 그 다음 주 트레이닝 스케줄을 문자로 받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케줄 대신, 다음 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장의 통보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당황했으나 유림은 식당 I 사장에게 용기를 내어 답 문자를 보냈다. 미숙했던 부분을 알려 줄 수 있겠냐고. 수습기간이었으나 최저시급 그대로 계산되어 입금된 내역을 확인한 직후였다. '우리 가게와 결이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 뒤에 숨이었는 진짜 이유를 진심으로 알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습기간 중에는 보통 (최저임금의) 8,90퍼센트의 보수만 지급하려고 하는 게 이 바닥 룰인데 최저시급의 100퍼센트 전부 계산해 준 사장이라면 유림을 내치기로 한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 솔직하게 답을 해줄 것 같았다.
"기존 써버들이 불편함을 호소했습니다. 유림 씨가 손님 주문받는다고 안 치운 테이블들이 너무 밀려서 보다 못한 기존 써버들이 테이블을 닦았다고요."
갑자기 오른쪽 전두엽을 뚫은 바늘이 왼쪽 전두엽을 통과해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불편함이라...... 짐작도 상상도 못 한 이유였다. 캐나다에서 난생처음 식당일이라는 것을 배울 때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처음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뭐든 해보겠다며 부딪히는 유림을 항상 칭찬했고 일한 지 6개월 만에 매니저 자리를 제안했었다. 유림은 지겨우면 지겨웠지 써버 일이라면 자신 있었다. 식당 일이란 게 거기서 거기인 게 많지만 그래도 새로운 가게에서 일을 시작할 때 신경 써야 할 게 있다면 주문받기다. 단일 메뉴가 아닌 이상 그 식당 메뉴에 대한 숙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주문을 신속하게 받을 수 없고, 주문 중 손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테이블을 치우고 손님을 맞이하는 테이블 기본 세팅은 이미 통과 점수를 받았으니 주문받는 것에 하루빨리 익숙해지고 싶었다. 익숙해지기 위해서 최대한 주문을 많이 받아봐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고 주문받을 기회가 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섰다. 적극적인 태도, 손님과 대화를 잘하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어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원래 있던 써버들 눈에는 신입 주제에 손님이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치우고 닦는 일을 피하기 위해 주문받는 포지션을 냉큼 선점한 것으로 보인 것이다. 같은 식당 안에서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사람들끼리도 계층은 분명 존재했다. 손님이 다 먹고 나간 테이블을 치우는 사람, 손님이 주문하기 전에 기본 반찬과 수저 등을 세팅하는 사람, 손님이 들어오면 맞이하고 테이블까지 안내하는 사람, 테이블 주문을 받는 사람,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확인하고 홀에 나가는 순서를 관리하는 사람, 그리고 테이크아웃 전화를 받고 포장하는 사람. 물론 작은 식당에서는 써버 한 명이 이 모든 일을 다 하기도 하지만 규모가 큰 식당에는 경력과 실력 (그리고 센스)에 따라 하는 일마다 위계가 잡혀있다. 이제 수습기간 일주일 째에 들어선 유림이 테이블에 가서 주문을 받고 있으니 손님들이 어질러 놓고 간 더러운 잔반 오물을 행주로 닦아야 했던 기존 써버들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 당연했다. 작은 식당에서 혼자서 혹은 다른 써버 한 명과 함께 일해 본 경험밖에 없던 유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일주일 만에 잘렸다는 사실보다 잘린 이유가 더 충격적이었다. 충격보다 수치인 것 같았다.
"잘 알겠습니다. 일주일 간 감사했습니다."
답장으로, 빨리 배워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모두 지우고 감사를 담은 짧은 인사만 남기고 문자를 보냈었다.
인터뷰에서 진실되지 않은 대답을 하는 게 영 찜찜했으나 어차피 취업 면접은 상 또라이를 거르는 데 목적이 있는 거니 어느 정도 선의의 거짓말을 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진실이 정답은 아니며, 모든 진실을 아는 것이 때론 최선이 아니기도 하니까. '사실은 제가 그만둔 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기존 직원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해고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저를 뽑으면 직원들이 불편해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유림이 거짓말까지 하며 진실을 숨기고 싶었던 이유는 이 레스토랑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과서 같은 거짓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딱히 더 추궁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는지 매니저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일주일에 얼마나 일하고 싶은지 출퇴근 용 자차는 있는지, 집은 가까운지 등 식당에서 직원을 뽑는 면접을 볼 때 나올 법한 상식적인 질문들이었다. 편하지 않은 영어로 오랜만에 인터뷰를 보려니 식은땀이 났다. 남자의 질문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시계를 확인하자 처음 이 식당에 들어온 지 45분이나 지나있었다. 인터뷰 질문은 여기 까지라며 말한 남자는 옆으로 밀어둔 랩탑을 다시 당겨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준수하다 아니, 솔직히 잘 생겼다, 젠장. 그제야 유림의 앞에 앉은 이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3분가량 랩탑을 더 들여다보더니 인터뷰는 이게 전부이니 가면 된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니 내 눈높이가 그 사람의 가슴께까지 닿았다. 키도 크잖아, 젠장.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그 사람이 출입문까지 배웅을 해 주겠다며 앞장섰다. 홀이 넓어서 출입문까지 한참을 걸었다. 어깨도 넓다, 이런 젠장. 그나저나 인터뷰 보러 온 사람에게 굳이 배웅까지? 뭔가 느낌이 좋았다. 떨어뜨릴 사람에게 배웅까지 해주진 않을 거잖아? 나 이제 여기서 일하는 거야?! 행복 회로를 돌리며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그가 닫히던 문을 잡고 따라 나오며 다급히 외쳤다.
"저, 뭐 하나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문이 닫힐 줄 알고 몸을 돌리던 유림은 깜짝 놀라 뒤돌아봤고, 다급해 보이기까지 한 남자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요."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섰으나 유림은 순간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