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3
소설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매니저라고 나타난 사람이 아시안인걸 확인했을 때, 보면 볼수록 코리안 캐네디언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여름철 내내 팔리지 않았던 시판용 김치 봉지처럼 유림의 희망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었다. 신분 상승(?)의 기회라는 게 어쩌면 달나라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10년의 고생이 헛고생은 아닐지 모른다고. 그러나 인터뷰의 긴장감이 풀리는 동시에 눈에 들어온 매니저의 외모가 지나치게 출중한 것을 파악한 순간 부풀었던 희망은 못 박힌 타이어에 공기압이 빠지듯 차분하되 신속하게 원상 복귀되었고, 바람 빠진 희망에서는 씁쓸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면접을 본 후 열흘 하고 이틀이나 더 지났다. 한국 사람처럼 보였던 매니저라는 사람이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한 것을 확인했던 순간에 이미 반쯤 체념했을지도 몰랐고, 그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The Northwood Room'같은 파인 다이닝의 써버가 된다는 건 너무 큰 희망사항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그런 곳은 비슷한 수준의 식당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뽑는다. 게다가 손님과의 대화에서 어색함이 전혀 없을 정도로 영어가 상당히 유창해야 한다. 그래도 들이밀 경력과 영어 모두 부족해도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빅토리아 시크릿 광고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외모를 가졌다면 기대해 볼 수 있다.
면접을 봤던 아시안 남자의 외모가 빅토리아 시크릿 급이 아니었다면 지나치게 기대를 해버리다 실망도 컸을 것이었다. 사람들 80퍼센트가 자신의 외모가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지만 유림은 한 번도 스스로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빈약한 골반과 별 볼 일 없는 가슴, 대한민국 평균에도 못 미치는 키에 특징 없는 이목구미는 언제나 그녀의 열등감이었다.
식당 출입문 밖에서 오갔던 추가 질문에 대한 질의응답이 끝나고 청해진 악수를 받으며 유림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용 여부는 언제 알려주시나요?"
"그건 몰라요. 일주일이 걸릴지 보름이 될지...... 같이 일하게 되면 문자로 알려드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연락이 가지 않을 거예요."
"아예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거죠?"
"예, 아마도...... 그렇겠죠"
그렇겠지. 사실 이런 곳은 하루에도 대여섯 씩 많으면 그 이상의 수의 지원자가 왔다 갈 텐데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 매니저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력을 다해 유감을 표현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인사담당부서가 따로 있는 대기업도 아니니까. 일도 하고 매니징도 하고 면접도 보고...... 바쁠 터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마냥 기다리라니 아무리 '4층'이라지만, 아무리 갑'이라지만 좀 너무하다 싶었다.
오늘만 13번째 문자를 확인한 유림은 스마트폰을 뒤집어 탁-하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연락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폰 화면만 들여다본다고 해결되는 건 없을 테고, 저번 달 카드 값도 아직 다 못 갚았는데 이번 달 월세를 내고 나면 360불 66센트가 남을 예정인 통장 사정에, 찬밥 더운밥, 흰색 노란색 따질 때가 아니었다. 허세 그만 부리고 정신 차리자, 도유림. 양 볼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 번 때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랩탑 뚜껑을 열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결국 또 이곳이다.
"ㅇㅇㅇ 스시에서 롤맨, 써버 구인합니다"
"경력 있는 써버님들 모십니다"
"다운타운 ㅇㅇㅇㅇ에서 풀타임 주방 직원 구합니다"
한인들을 위한 캐나다 포털 사이트의 구인란. 참 징글징글하게도 많다. 캐나다에 온 한국 사람들은 전부 식당, 그것도 일식당을 차리는 모양이다. 이미 포화 상태인 것 같은데 계속 생기고, 주인이 바뀌고, 없어지고 또 생기고...... 하긴 그러니 직원들이 먹고사는 거겠지. 구인한다는 게시글에 식당 정보는 전혀 없이 연락을 달라는 짧은 말과 함께 휴대폰 번호만 올라와 있는 광고는 거른다. 식당의 매력을 한 층 더 끌어올리기 위한 신비주의 전략일 리는 없다. 식당 이름을 내 걸기에 분명히 뭔가 께름칙한 게 있는 것이다. 구인 광고에 식당 정보가 있다고 해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스마트폰 메신저의 익명 단체 채팅 중에서 밴쿠버 한인 정보방이나 밴쿠버 한인 자영업 정보 방, 혹은 SNS에서 식당 이름으로 검색을 해본다. 혹시 과거에 시끄러운 소문이 있었는지 찾아본 뒤 연락할지를 결정하는 게 좋다. 물론 그걸로 걸러지지 않는 신규 악덕(?)도 있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방지책이라고 여길 뿐 안심은 절대 금물이다.
거르고 걸렀더니 16개의 후보 중 절반이 날아갔고, 그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반경 2킬로미터 안으로만 추렸더니 3개밖에 남지 않았다. 게시글에 나와있는 연락처로 간략한 소개와 함께 문자를 보냈다. 드르륵. 세 번째 문자를 보내고 폰을 다시 내려놓기도 전에 진동이 왔다. 앞 서 보낸 두 곳에서 동시에 답장이 왔다.
문자 1: "나이, 성별, 일 할 수 있는 요일과 시간?"
미친놈.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유림은 육성으로 욕을 뱉었다. 손가락이 부러져서 발가락으로 문자를 친다고 해도 이것보단 길게 쓰는 수고 정도는 들여야지. 이러고도 '사장님' 소리는 듣고 싶겠지?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고 우길 순 없지만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가면 사람대접 아니, 취급 못 받는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음, 성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음, 일? 당신이랑은 일 할 수 있는 요일도 시간도 없음.'이라고 보내고 수신차단을 걸어 버리고 싶었으나 심호흡을 크게 세 번을 한 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무례한 문자를 받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엇보다 전화번호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문자에 답장이 왔다.
문자 2: "안녕하세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ㅇㅇ 스시 홀 매니저, 진(Jin)이라고 합니다. 식당 경력이 꽤 길다고 하셨는데 혹시 어느 정도이실까요?"
첫 문자의 미친놈 효과로 두 번째 문자가 지나치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답장: "여기저기 다녀서 햇수가 정확하진 않은데 2~3년 정도 될 거예요."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백수로 지낸 3년과 일용직과 단기 알바를 하고 지낸 1년을 제외하면 써버로는 4년 롤맨으로는 2년, 식당 경력은 총 6년이었다. 같은 업종 경력 최소 1년만 넘으면 예선 통과로는 무리 없는 경력일 터였다. 최저시급일 게 뻔한 신규 써버의 후보로 경력 2~3년이 구인하는 입장에게 가장 부담이 없는 적당한 수준이라는 걸 유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써버는 팁잡(Tip Job)이다. 매니저 급이 아닌 이상 경력을 우대하여 시급을 더 쳐준다거나 여타 회사처럼 풀타임(일주일 35시간 이상 근무)이라고 복지 혜택을 준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간혹 경력이 긴 사람들이 경력을 우대해 달라며 최저시급보다 더 높은 시급을 요구하여 곤란한 상황이 종종 생기기 때문에 무조건 경력이 많다고 두 팔 벌려 환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림이 2~3년이라고 대충 얼버무린 데에는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3년이면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5년이면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을 든든한 직업 하나쯤 꿰찰 줄 알았으며 7년이면 내 집과 내 차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집도 절도 차도 없이 식탁만 닦아 댄 캐나다 거주 10년의 이력을 유림 스스로 창피하게 여겼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캐나다에 온 지 얼마나 됐냐고 인사치레로 묻는 질문에도 3,4년쯤 됐을 거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문자 2: "그럼 일식 메뉴는 익숙하시겠네요. 혹시 이번 주 안으로 인터뷰 괜찮으실까요?"
답장: "예. 언제가 좋을지 말씀해 주시면 맞춰 찾아뵙겠습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문자가 오지 않았다.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쳐 바빠졌나? 식당 일이라는 게 예고하고 바빠지는 게 아니니까. 반나절이 지나도록 면접 일시를 알려줄 거라 기대했던 두 번째 문자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뭔가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밀린 설거지를 한 후 개수대 옆에 놓인 조용한 폰을 한참 동안 째려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늦은 11시. 유림은 자야겠다며 생각하고 전등불을 껐다. 드르륵. 그때 갑자기 폰이 진동했다. 첫 번째 진동이 끝나기도 전에 폰을 집어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며칠 전에 이미 사람을 구했는데 광고 내리는 걸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기다리던 매니저 진의 문자는 아니었다. 낮에 소개와 함께 지원 문자를 보냈던 세 번째 구직 지원에 대한 답장이었다. 알려줘서 감사하는 답장을 보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텅 빈 냉장실을 노려봤다. 꺼내거나 넣을 게 있어 냉장고를 연 것은 아니었다. 유림의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연 김에 하얗게 곰팡이 핀 토마토와 뿌리 쪽이 시커메진 양배추를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딱히 볼 일이 없어도 일단 열어 보면 할 일이 보이는 게 냉장고였다. 보름 째 썩어가던 구석에 있던 반찬을 꺼내거나 곰팡이 발생 여부를 확인하다거나 말라붙은 김칫국물 자국을 닦는다거나...... 그런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나면 머릿 속도 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통화 버튼을 눌러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기, 진 매니저님, 도중에 대화가 끊겨서 전화드렸어요. 이번 주 언제 찾아뵐까요?'라고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냉장고 볼일을 끝낸 유림은 휴대폰은 일부러 먼 곳에 충전시켜두고 이번엔 냉동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