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5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이력서가 지금 없어서 일단. 경력은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일주일에 사나흘 언제든 일 할 수 있으니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음식값을 지불하고 받은 영수증 뒷면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빠르게 휘갈겨 적은 후 사장에게 다시 건넸다.
'네가 뭔데?' 짧았지만 분명 사장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스시바 건너에서 흥미로운 곁눈질을 하던 두 명의 한국 셰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삼, 이, 일, 반, 반의 반......
"내일 오후 다섯 시."
나이쓰. 유림은 자신의 촉과 직감에 꽃다발이라도 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소의 유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돌발행동이었다. 아니 사실 도박이었다. 유림은 24/7 돌아가는 콜센터처럼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 때문인지 말 수는 지나치게 없었다. 표현이 없는데 붙임성과 사회성이 좋을 리는 만무했다. 사회는 그런 사람을 보고 내향인이라고 불렀고, 그 사회가 지칭하는 내향인의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했던 유림은 캐나다에서 산 이후로 더욱더 극단적인 내향인이 되었다. 그랬던 유림이, 써버 필요해 보이는데 내 경력 걱정하지 말고 그냥 믿고 쓰라는 베짱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미친것 같긴 했다. 놀라웠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우주에서 빛의 속도가 절대적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법칙은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그것이 '진공'에서라는 전제조건이다. 공기, 물, 유리 따위의 매질을 만나면 속도는 느려지고, 방향이 꺾이며 그 순수성을 잃기 시작한다. 물리학에서 굴절과 산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광자의 속도만큼이나 절대적인 경외를 자랑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밴쿠버 한인 바닥에서 흐르는 소문의 속도다. 소문의 기본 입자인 정보가 이동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사회적 관계라는 매질 속을 이동할 때 매질의 점도나 밀도에 따라 정보의 굴절은 심해진다.
유림은 그런 뻑뻑한 매질 속에 들어가 어떤 식으로 왜곡될지 모르는 소문의 입자를 제공하는 주체가 되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사람과의 가까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유림은 어느 순간부터 인연은 도박 같은 거라 믿었다. 딱 좋을 때까지로 절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자제력은 그 관계에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말이다.
오늘 도박을 건 행동은 그런 위험에 노출되기 딱 좋은 베팅이었다. 뱀 사장이 문을 나서는 유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유림이 그 가게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고, '인상 세탁'을 할 수 없었다면 흥미로운 소문 하나 생성하기 딱 좋았을 것이었다. 얼굴, 이름, 전화번호까지 아주 완벽한 소문의 입자까지 제공한 마당이었으니 말이다.
뱀사장의 이름은 미스터 팍이라고 했다. 스스로 미스터 팍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성만 알려준 사장은 유림의 신상은 깨알 털듯 탈탈 털었다. 전날 영수증에 적어준 이름이 법적 이름인지, 나이는 얼마며, 미혼인지 기혼인지, 자녀는 있는지, 캐나다에 얼마나 살았고, 비자의 상태는 뭔지, 집은 가까운지, 자차 출퇴근 계획인지, 써버 경력은 얼만지, 초밥메뉴 이름에 익숙한지. 두 번째 질문을 들을 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길로 걸어 나오고 싶었으나, 삼 주 후로 다가온 월세날과 통장 잔고의 숫자를 최대한 떠올리려 노력했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25분 간 한 명상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마음 비우기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12번째 질문이 이어질 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만이다. 일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일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직업이 '일식당 써버'라는 사실은 싫었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궁금했을 많은 질문들을 이제 어느 정도 해소했는지 미스터팍은 오늘 일단 일해보고 결정하자며 시커먼 뭉치를 떠넘기듯 건넸다. 엉겁결에 받아 들고 보니 검은색 앞치마였다. 미스터 팍이 알려준 카운터 아래 공간에 가방과 겉옷을 벗어 구겨 넣은 다음 앞치마를 들고 화장실에 갔다. 허리부터 허벅지까지 오는 짧은 앞치마에 기름과 와사비가 여기저기 묻어있었고, 주머니 귀퉁이의 박음선이 터져있었다. 지금껏 앞치마가 정갈하게 관리되는 식당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랍진 않았다. 음식물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지만 주문지, 펜, 계산서 등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용도로도 쓰이는 앞치마를, 매일 세탁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 그렇게 까지 하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3개월 동안 한 번도 세탁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가게 오너는 본인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니들이 쓰는 건데 내가 왜?'라는 마음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매번 카운터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찌든 앞치마 더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덜 더럽고, 박음질이 온전한 것을 찾아 뒤지는 게 지겨워 하루는 사장에게 제안한 적이 있었다. 앞치마를 하나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가지고 다니면서 깨끗하게 세탁도 하고 관리도 하며 쓰겠다고. 그러나 사장은 유림이 매일 일을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동안 다른 써버들이 사용할 수 없다며 유림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써버들이 하나둘 씩 들고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두는 일이 많아 회수되지 않은 앞치마가 지금껏 너무 많았다고 덧붙였다. 손바닥 만한 앞치마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러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당연히 참았다. 그렇게 나온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비슷한 모양의 앞치마를 유림이 직접 구해서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림은 임시적 돈벌이라고 생각하는 식당 알바일에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마치 '앞치마 딜레마' 같은 것이었다. 아마 다른 써버들도 더러운 앞치마 더미를 헤집으며 질색했겠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체념했으리라. 앞치마 딜레마는 식당주인과 써버들 간의 얄팍한 유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내가 왜?'와 '그렇게까지는......'의 사이에서 핑퐁처럼 떠밀린 앞치마에는 깨끗해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오물이 차곡차곡 축적되었다.
앞치마에 눌어붙은 와사비 자국을 물 묻힌 휴지로 대충 떼어내며 화장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따로 청소업체를 부르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는 분명 연분홍색이었을 빛바랜 회색 직물로 덮인 화장실 세면대 아래의 더미들은 화장실 페이퍼타월이나 투고용(테이크 아웃용) 봉지 따위의 비품들인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창고 선반에 쌓여있는 물건들도 눈으로 재빠르게 훑었다. 왼쪽 선반에는 주방용 간장과 식초, 그 아래는 투고용(배달 포장용) 소형 간장과 와사비가 들어있었다. 오른쪽 선반에는 배달 포장용 그릇과 일회용 물품들 그리고 아직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각종 음료 재고들이 쌓여있었다.
한국 사람이 분명할 거라 짐작했던 스시바의 셰프들은 역시 한국 사람들이 맞았다. 직원들과 아는 체를 하고 싶었으나 아무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갑자기 일을 조금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스시바 한국 셰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나 끌어올린 목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인사를 한 건지, 아니면 턱에 흐르는 땀을 어깨에 닦는 건지 헷갈리는 목례가 전부였다. 스시바 옆에 붙은 주방 안을 살피니 두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필리핀, 아니면 베트남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인도 여자 한 명이 철판과 튀김기 앞에서 고개를 돌려 유림 쪽을 바라보았다.
"하이, 나이스 투 미츄."
"하이...... 웰컴."
한 명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유림보다 어려 보이는 인도 여자는 비닐장갑 아래에 낀 목장갑 끝부분으로 눈가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둘 다 바빠 보였다. 계속 일하게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굳이 통성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림이 먼저 이름을 얘기하지 않은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