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11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사케랑 미소국 전원 켜는 거예요. 그게 데워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라 혹시 아침부터 핫사케 찾으시는 손님 있으면...... 뭐 잘 아시겠지만요. 제가 알려드린 것 외에도 궁금한 거 있으시면 일하시면서 계속 물어보세요."
첫 출근 날 진은 유림에게 오픈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다른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림은 진이 무언가를 알려줄 때마다 '잘 알겠지만'이라고 덧붙이는 게 부담스러웠다. 경력이 길다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유림은 진의 말처럼 진짜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1년 전 유림은 이곳에 서 있었다. 식당 이름을 제외하면 내부는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아무리 운전 공백기가 길다고 해도 한 번 운전을 익힌 사람은 그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유림의 몸은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오픈 준비 동선을 그려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굳이 진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사케와 미소된장국 기계에 전원을 넣고, 화장실과 홀 내부에 청결 상태를 확인한다. 음소거 상태인 티브이를 켜고 음악을 튼다. 포스(Pos)에 혹시 전날 털지 않은 주문 내역이 있는지 확인하고 리셋을 한다. 전날 마감을 한 써버가 세제와 락스를 탄 물에 담가놓고 간 행주를 빨고, 직원들을 위한 커피를 내린다. 가성비가 좋은 대형 마트 브랜드의 대용량 커피 원두였다. 맛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직원용 커피를 제공한다는 건 좋은 나름 좋은 싸인이었다. 커피 머신을 보관하는 서랍 한쪽에는 한국 식품점에서 샀을 게 분명한 익숙한 한국 과자들이 담긴 직원용 간식 바구니도 보였다. 주방 구석에 있는 설거지 기계 맞은편에 있는 선반에서 잘 마른 식기구들을 꺼내 각자 있어야 할 위치에 정리하고 있으면 커피 향이 식당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식기 정리가 끝나면 테이크아웃 일회용 용기들과 젓가락을 창고에서 가져와 홀 내부 선반에 채워 넣는다. 하는 김에 젓가락과 소용량 간장을 냅킨으로 돌돌 말아 포장이나 배달 음식에 같이 들어갈 젓가락-간장 세트 뭉치를 만들어 바구니에 채워둔다. 비품들을 가득 채워 넣은 선반과 바구니를 둘러볼 때면 총알이 가득한 총을 양 어깨와 허리춤에 차고 전쟁을 맞는 병사가 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딜리버리 앱이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 패드 화면을 켜고 연결 상태를 확인한 다음 출입문에 걸린 'OPEN' 싸인에 전원까지 올리면 진짜 전쟁 준비 완료다. 유림이 열어놓은 출입문을 통해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오늘의 아군이 되고 또 누군가는 오늘의 적군이 될 것이다.
오픈 시각은 언제나 오전 11시. 문을 연다고 바로 손님이 오거나 주문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가한 오전 시간에 틈틈이 미소된장국그릇에 준비된 건더기 재료를 소분해 넣어 쌓아두어야 한다. 바쁜 때를 위해 얼마나 미리 대비해 놓을 수 있는지는 써버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다. 미소국에 들어가는 건더기 재료는 가게마다 달랐는데 미즈키는 미소국에 아주 잘게 썬 파와 두부를 넣었다. 마른미역 부스러기나 유부 조각을 넣는 곳도 있었다. 사장들은 미소국에 들어가는 건더기 재료의 양에 집착했다.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생후 6개월 된 아기의 첫 앞니보다 작게 썬 두부를 6조각 이하로 맞춰야 했다. 4조각에서 6조각 사이가 가장 이상적이다. 잘게 썬 파 조각이나 미역 부스러기 같은 건더기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작은 것들에 집착하는 사장들이 이해가 안 됐다. 몇 조각 더 넣는다고 망하는 것도 아닌데 까탈스럽게 구는 사장들을 보며 쪼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유림 스스로 적정량을 넘지 않도록 조절하게 됐다. 간혹 파를 빼달라느니, 두부를 대신 더 넣어달라느니 하는 손님들이 있었으나 50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였고, 미소국을 받아 든 손님들은 그 안에 떠있는 건더기가 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부가 아니라 두부 모양으로 자른 마시멜로우가 들어있대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국을 숟가락으로 퍼먹는 대신 손으로 그릇 째 들고 마시기 때문에 손님들이 내놓은 미소국그릇에는 대부분의 건더기가 바닥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림이 철저히 적정량의 건더기 재료를 넣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재료를 작게 자른 후 파에는 키친타월을 깔아 수분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고 두부에는 물을 채워 마르는 것을 방지하는 등, 보관과 관리가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성탄절 무료 배식을 하듯 자비로운 미소국(유일하게 써버의 권한이 있는 음식이므로)을 만들어 내가던 유림도, 자비를 베풀수록 손발이 고생하는 건 본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장이 시키는 6조각을 넘지 않도록 애쓰게 되었다.
사실 건더기를 아예 넣지 않아도 장사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멀건 국물만 담긴 것보다 무엇이라도 둥둥 떠 있으면 일단 보기가 좋았다. 단 돈 5센트 더 들여서 1달러짜리처럼 보일 뻔한 한 미소국 한 그릇을 2.9달러의 구색으로 맞춰주는 건더기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림은 시간과 재료를 들여 띄운 건더기들이 고스란히 바닥에 남아있는 그릇들을 회수해 음식 쓰레기통에 털어 넣을 때마다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비단 된장국뿐이겠는가. 사시미 밑에 깔리는 무채나 장식용으로 올라가는 파슬리, 당근, 그리고 식용꽃까지, 하나의 식당에서 먹히지 않고 버려지는 식재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미소국 바닥에 가지런히 깔려 있는 하얗고 매끈한 두부조각들을 볼 때면 유독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숟가락에 스치지도 못한 조각들이 깊고 시커먼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질 때 유림도 그 깊은 심연 속으로 같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색만 맞추다 버려지는 존재.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한 메뉴 미소국. 그래도 미소국의 가치를 세 배 가까이 올려주었으니 두부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동안 쓸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매니저 진이 입버릇처럼 덧붙이는 '잘 아시겠지만요'라는 말이 불편했던 이유도 결국 이것이었다. 유림의 이력을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말속에는 '누구나 잘 알게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2,3년 이상 하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구인광고 한 번 올리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노동력. 식상한 투정이지만 유림은 캐나다에 오면 접시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는 메인요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모두가 기다리는 주인공 다운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엔가와 초밥이나 오도로 사시미처럼 화려한 플레이팅의 중심에 서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메인은 꿈도 꾸지 않는다. 가게에서 가장 비싼 메뉴인 '플래티넘 모둠 사시미'가 나가는 날 각종 해산물과 장식품으로 꾸며진 화려한 접시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손님 테이블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사시미 옆을 지키는 파슬리라도 되면 좋겠다고. 하얗거나 붉은 생선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초록색 파슬리는 최소한 존재감 하나는 확실했다. 싱싱한 파슬리 이파리 위에서 반짝거리는 물기는 여기서 내가 이 접시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빛나고 단단한 자부심처럼 보였다.
파슬리도 욕심이라는 자각을 한 걸까. 어느 순간부터 쓰레기통으로 떨어지는 두부 조각이 된 것만 같았다. 포장 용기의 문이 열리고 처음 세상의 공기와 만났을 때, 셰프의 날 세운 칼날로 새끼손톱의 반의 반만 한 크기로 정교하게 잘릴 때, 신선한 물과 함께 용기에 조심스럽게 옮겨 담길 때 두부 조각들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곧 멋진 요리가 될 거라는. 적어도 사람들의 숟가락 끝도 스치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빈 그릇 들고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거기 뭐 있어요?"
미소국그릇에 남겨진 완벽한 6개의 두부 조각을 보고 있으니 진이 다가와 신기한 듯 물었다.
"매니저 님, 저 오늘 미소국 30그릇도 넘게 냈는데 두부와 파까지 다 드신 손님이 한 분도 없었어요."
"그런데요?"
"매끈하고 하얗게 남겨진 두부가 너무 슬퍼서요."
아주 약간은 농담이었으나 유림은 거의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슬펐다. 오죽 그랬으면 매니저에게 슬프지 않냐며 말도 안 되는 공감을 강요했을까. 유림은 자신이 그런 감성적인 말을 입 밖에 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황급히 미소 그릇을 쓰레기통에 털어 넣었다. 괜히 민망해서 평소보다 세게 털었다.
"그게 해방일 수도 있잖아요."
"네?!"
"두부는 미소국에서 동동 떠있다 잡아 먹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게 해방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요."
"...... 그게 쓰레기통인데도요?"
진은 유림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양팔을 벌린 채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떴다.
"그리고"
"네?"
"설거지 엄청 쌓여있는데 그릇 정리 안 하고 뭐 하고 있어요?!"
유림은 머쓱한 기분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버려지는 두부.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이방인일 유림이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쓸모의 강박에 대한 근원적 저항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림이 뭐라고 생각하든 진의 말대로 그 버려짐은 어쩌면 쓸모없음의 증거가 아니라 임무완수의 결과일지 몰랐다. 슬프거나 버려진다는 시선도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속단일 지도 모른다. 존재의 시초에는 이유가 없을지 몰라도 실체의 존속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